[주경업이 만난 洛東江 사람들] 10. 돛단배(범선) 만드는 목수 김창명 씨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내가 만든 배 덕분에 고기 잘 잡힌다는 말 들으면 기뻐"

범선에 돛을 달고 배를 살펴보는 김창명 목수. 최경헌 사진작가 제공

탕! 탕! 탕! 탕! 하단포 나루터 주막 기둥에 매단 '포탄껍데기 종'이 울리면 주막에서 술 추렴하던 사람이나 짐 보따리 위에 걸터앉았던 선객들이 하나 둘 나룻배로 몰려갔다. 필자도 그 속에 섞여 가방 들고 나룻배에 올랐다. 낙동강을 시원하게 가르는 뱃길은 일응도와 을숙도 샛강을 따라 명지로 이어지고, 명지에서 진해행 버스에 올라 고향 집으로 갔다. 1950년대 말 필자가 대학 다닐 때 이야기다. 1970년대만 해도 낙동강 하류의 섬(하중도)이 많은 대저·강동동 남단은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고기잡이를 위해서나, 조개 채취를 위해서도 배가 필요했다. 주로 노 젓는 거룻배였다. 멀리 상류까지 소금 따위를 운송하는 것은 거룻배에 돛을 단 돛단배(범선)였다. 발동선(우리는 이를 똑딱선이라 불렀다)을 들여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증조부 때부터 4대째 '조선장' 가업 이어와

57년간 '외길 인생'… 1천 척 넘게 만들어

목선·돛단배 제작 기술 후대까지 계승되길



강을 오르내리기에는 배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형선(平底型船)이 최상이었다. 두꺼운 판자를 서로 맞대어 피새(참나무 못)로 이어 붙여 만든 목선은 노를 이용해 좌우 회전을 재빨리 할 수 있었고, 얕은 곳까지도 접근할 수 있어 요즈음 사람들이 자가용 지니듯 집 앞에 한 척씩 매어 두었다. 당시 배를 오래도록 부리던 사람(선주)들은 대목장(大木匠)을 초빙해 배 한 척 어렵잖게 모으던(造船) 시절이어서 낙동강 동·서 양안에는 이런 조선소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선박 제조기술이 발달하면서 돛단배를 더는 건조하지 않게 된다. 품이 많이 들고 시일도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FRP 선박이 판을 치면서 목선기술자들은 설 자리를 잃고 다른 직종으로 옮겨갔다.

칠십 노구지만 배 위서 몸놀림 아직 민첩

지난 1월 중순 하단 어촌계 포구에서 돛단배만 57년간 만들어온 조선장(造船匠) 김창명(金昌命·74) 씨를 만났다. 포구엔 지난해 9월 진수한 길이 24.5자, 상폭 5.7자인 돛단배가 싱싱한 나무 냄새를 품고 정박해 있었다.

김 씨와 함께 배에 올라 노를 저어 낙동강으로 나왔다. 강안을 벗어나서야 키(舵)를 꽂고, 앞뒤 돛대에 돛을 올려 펼친다. 황포돛대다. 석양에 황토빛깔이 더욱 선명해 눈이 부신다. 칠십 노구인데도 배 위에서의 몸놀림이 여간 민첩하지 않다. 바람을 받은 돛은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키를 잡은 김 씨의 얼굴도 한없이 평온해진다.

10남매 중 유일하게 가업 이어받아

김창명 씨는 증조부로부터 하단에 살면서 배를 만들어 온 하단 토박이다. 증조부가 조선장(造船場)을 처음 일군 곳은 지금 집의 남쪽이었다. 이 일대는 괴정천 물가인 하단포였다. 그가 살던 지금의 집터(부산 사하구 하단1동 608-57번지 14통 2반)는 선착장이었는데, 그 앞으로 갈대밭이 하굿둑까지 이어졌다. 물이 들면 괴정천(복개해 지금은 길이 됐다) 안까지 배가 들어왔고, 집 앞에 배를 정박시켰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큰길의 하단동사무소도 바다여서. 썰물 때는 지금의 도시철도역 주차장으로 물이 빠지는 하단선착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

"배 모은 일은 증조부 때부터 했지예, 조부님도 아버님도 배 모으는 일에 한평생을 바쳤습니더. 저는 열일곱 살 때부터 조선 일을 했으니까 이 일 한 지 57년이나 됐지예." (배 만드는 일을 그는 꼭 "배 모은다"고 했다.)

증조부 김두행(金斗幸)으로부터 이어받은 조선장은 가업이 되어 할아버지 김원선(金元善), 아버지 김만이(金萬伊)로 이어져 김창명 씨로 4대째 계승됐다.

위로 형과 누나가 둘씩 있는 6남 4녀, 10남매의 다섯째인 김 씨가 유일하게 가업을 이었다. 모두들 험하고 힘 드는 이 일을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였다.

사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수동의 피난학교 오산중학교로 진학하지만 1955년 중퇴했다. 어릴 때부터 배 모으는 일이 신기하여 학교가 파하면 조선장으로 달려와 근처를 맴돌며 놀다가 필요한 연장을 건네주는 등 잔심부름하던 소년은 정식으로 조선 기술을 배우는 일에 입문하게 된다. 열일곱 살 때이다. 학교 공부보다 배 만드는 일이 더 재미있고 좋았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영도 등지에서 바닥이 뾰족한 일본 배가 많이 조선될 때에도 낙동강 하구에서 상류를 오르내리기에 편리한 바닥이 평평한 배만 조선하였다. 아버지의 배 만드는 기술은 그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제대 후에는 한눈팔지 않고 본격적으로 부친을 따라 가업을 잇는 일에만 전념한다. 1970년대 들어 강을 이용한 수송 수단이 육로 수송 체제로 전환되면서 나룻배 대신에 고기잡이배(어선) 조선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공장일은 더 바빠졌다.

목선 주된 재료는 삼목

목선을 만드는 주된 나무는 삼목(杉木, 杉松)이다. 배를 모을 나무를 제재(製材)하여 건조하는데 3개월, 조선하는데 대략 3개월이 걸린다. 김 씨는 1955년 조선에 입문할 때부터 아버지가 사용해 오던 공구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대형 만력기(죔쇠), 자, 통, 도끼, 자귀, 배못, 배밥, 대패, 먹통과 먹칼, 물반(수평 보는 것), 꺾쇠, 못빼기 등이 손때가 묻어 반들거린다.

나무 제재서 배 건조까지 6개월 소요

김 씨가 길이 15자의 소형 목선 얼개를 그림으로 그리고 때론 사진을 보여주면서 배 만드는 방법을 현장감 있게 설명해 준다.

배 만들기는 말린 삼나무로 '배밑'(또는 '밑판')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한다. '배밑'은 두꺼운 판자를 여러 개 나란히 놓고, 만력기로 조여 배못으로 결착시킨다. 배밑 모양을 톱으로 재단하여 배 앞부분(이물)에 삼각형의 긴 나무로 선수재(船首材)를 세우고 후미(고물)에는 선미판을 세운다. 그리고 배의 좌우를 감싸는 선측판(杉板)를 조여 붙인다.

선측판까지 붙이면 일단 배의 전체 모양은 잡힌다. 배의 칸막이는 가룡목(加龍木) 5개를 가로로 설치하여 칸막이를 대고 물칸을 만든다. 배끝에 선미재(船尾材)를 설치하여 배 방향키를 장치하도록 둥글게 홈을 판다. 원통형의 긴 나무를 두 쪽으로 쪼개어 뱃머리인 공목(拱木)에서부터 배 가장자리와 선미 쪽으로 휘어 붙여 배를 튼튼하게 한다(이런 '태(胎)붙이기'에는 단단한 삼엽나무를 써야 한다). 선수에 Y자형의 삿대와 노걸이를 설치하고 배 위에 널빤지를 깐다. 그리고 짐대를 세우고 노와 방향키를 만들어 얹고 돛을 짐대(돛대)에 달면 목선이 완성된다.

목재소에서 나무를 제재해 건조하고 조선하기까지는 대략 6개월이 걸린다.

목선에는 노(櫓)의 역할이 크다. 바람이 없을 때는 노를 저어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살을 가르는 노는 튼튼해야 한다. 6자의 노우대를 13자 크기의 노물밑과 이어서 만든다. 노우대에는 노풍달(손잡이)을 끼우고 노물밑에는 노앞잔지(노를 끼우는 곳)를 부착하여야 한다. 노가 한 개 일 때는 왼노(고물 왼쪽에 노쇠를 장착)를 쓰고, 큰 배는 가운데와 좌·우 세 개의 노를 장착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광목을 황토물에 담가 만든 황포 돛을 만든다. 이 모두를 그의 손으로 만들었다.

황포돛배 여유로움, 부산 사람 '낭만'

1962년 제대한 뒤 그간 익혀왔던 기술을 발휘해 첫 배를 진수한다. 그리고 서른한 살 되던 해에는 스물여섯 살의 김해 대저면 도도리 출신 유복순과 결혼한다.

아버지를 따라 진주, 삼천포, 하동, 남지, 수산, 삼랑진, 구포 그리고 멀리 전라도 군산까지 가서 범선을 만들었다. 1980년 부친이 돌아가신 뒤에는 조선장과 집의 위치를 바꿔 조선장을 더 넓게 재정비했다. 가계부를 기록한 부인의 이야기로는 지금까지 1천 척 넘게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김 씨는 목선의 수명을 10~20년으로 본다.

하지만 성심성의껏 만든 배가 관리 잘못으로 파손되어 수리하러 선착장에 들어오면 선주에게 섭섭한 마음이 앞선단다. 자식이 매를 맞아 상처입고 들어온 것과 같아 마음이 아프단다. 만들어 내보낸 배 덕분에 고기 잘 잡히고 돈 잘 번다 하면 내 일인 듯 기쁘다고 한다.

"배를 타다가도 멀리서 이물만 보면 내가 만든 배인 줄 알지예, 잘 나가던 시절에 '하단선창조선소'라 카면 알아 주었지예, 이 근동에 증조부 때부터 4대 이상 가면서 배 만드는 곳이 어디 있덩기요."

그저 배 만드는 일이 좋아 중학교를 중퇴하면서 57년 동안 배만 만들어 온 장인, 오로지 배 만드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 어쩌면 배 귀신에 씌었을 줄도 모르는 외길 인생을 살아온 그는 오로지 배 만드는 기술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젠 어선들도 FRP 선으로 바뀌면서 목선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근해 어선으로서는 목선의 쓸모를 능가할 수 없다고 한다. 돛단배의 정취 또한 그러하다. 낙동강 하구에 한가롭게 오가던 돛단배의 풍경은 옛 풍류 시인들의 시흥을 돋우었으니, 주옥같은 시어 속에 노닐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일에 관심을 두는 두 자녀도 '돛단배'엔 도통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주경업
김 씨는 요즈음 하단선착장 곁에 있는 조선장에 나와 선거(船渠, 도크)에 올려놓은 배들을 살핀다. 2009년 경남 창원시 웅천 와성마을의 코리아 마린레저에 황포돛배를 재현하여 진수하였고, 그해부 터 리딩선박개발㈜에서 돛단배 기술고문으로 대학생들에게 기술 지도를 하고 있다. 벌써 10년 가까이 김 씨를 돕고 있는 조목근(曺睦根·62) 씨와 함께 이다.

그렇게 돛단배에 빠져 낙동강과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호수와 같이 잔잔한 강 위를 바쁠 것도 없이 서 있는 듯 떠가는 황포돛배의 여유로움은 낙동강을 사랑하는 부산 사람의 낭만이 아니었던가.

노을 진 강 너머로 표표히 떠가는 돛단배를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도 아름답게 보였다.

부산민학회 회장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