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복지시설 고정 관념 깬 '수국마을'
입력 : 2014-04-11 16:44:12 수정 : 2014-04-14 07:47:06
아파트 헐고 지은 단독주택… 자립 희망도 함께 입주했다
수국마을 가운데에 있는 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쉼터이다. 줄넘기를 하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을 강기표 건축가가 카메라로 찍고 있다.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건축과 우리 삶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비록 오래 걸리고 더디지만, 건축은 분명 우리를 바꾼다.
이 말에 부합되는 건물이 있다. 바로 부산 서구 암남동에 위치한 수국(樹國)마을이다. (재)마리아수녀회서 운영하는 수국마을은 복지시설이 갖는 부정적 혹은 고정적 이미지를 단숨에 깨 버렸다. 수국마을을 보면 건축이 우리를 바꾼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난 7일 이곳을 찾았다. 수국마을은 우선 기존의 보육시설이 갖는 모양새부터 다르다. 1980년대 지어진 낡은 복도식 아파트형 기숙사를 허물고 지난해 9월, 8개 동짜리 단독주택형 공간으로 지었다.
마리아수녀회 운영 복지시설
주택 8채 모인 '마을'로 재탄생
집안 곳곳 소통 위한 공간 배치
식구들 표정 밝아지고 갈등 줄어
고교 졸업 후 홀로 서야 할 아이들
일상 스스로 결정하며 예행 연습
이곳에서 이장 수녀로 통하는 셀리나 수녀는 단독주택형으로 짓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수녀님들이 모든 걸 다 해 주다 보니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적응하는 게 힘든 것 같았어요, 특히 사회에 나가 혼자 살 수밖에 없는 처지의 아이들인데 말이죠. 그래서 시장도 보고, 요리도 해 보고, 전기세도 내 보는 경험을 하게 해 사회생활에 필요한 자립 훈련을 할 수 있게 하고 싶었죠."
아이들도 이걸 원했다. 이런 건축주(?)의 마음은 건축가와 통했다. 10년 가까이 마리아수녀회에 후견인 역할을 해 온 건축가가 공동대표로 있는 건축사사무소 오퍼스(공동대표 우대성, 조성기, 김형종)에서 설계를 맡아,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갈등도 있었다. 수녀들도 자립 속에서도 다소의 통제된 공간을 원했다. 하지만 건축가의 생각은 달랐다. 될 수 있으면 감시나 통제의 느낌은 피하고 싶었다. 거리감은 대화를 통해 조금씩 좁혀 나갔다. 설명회도 가지고 모델하우스도 만들어 미리 볼 수 있게 했다.
우대성 건축가는 "아이들의 개인 공간이 많아진 대신 감시자의 역할을 하는 수녀의 방을 잘 모르게 숨겨 놓은 것도 그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간 소통에 주력했다. 2~3명이 동시에 일을 할 수 있게 주방을 꾸미고, 동마다 벽면에 게시판과 칠판을 설치해 끊임없이 대화할 수 있도록 한 게 그것이다.
수국마을은 마치 일반 가정집 8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다. 각 동에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13~15명 정도가 거주한다. 수국마을에 100명 정도의 학생이 거주하는 셈이다.
수국마을은 '나무나라'라는 의미이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나무며, 나무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큰 의미에서 마을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수국마을엔 또 다른 수국의 의미도 있다. 바로 수국꽃이 피는 마을이다. "수국마을에서 수국꽃을 연상하는 것 같아요. 현재 몇 그루 심어져 있는데, 앞으로 수국을 좀 더 분양받아 더 많이 심으려고 해요." 셀리나 수녀가 말했다.
수국마을은 동마다 이름이 따로 있다. 사과, 자두, 대추, 모과, 감, 석류, 무화과, 매실. 한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과일을 선택했다. 색감도 고려했고 내부 인테리어도 과일 색과 분위기를 같이했다. 동 추첨도 아이들 대표가 집을 분양받듯이 추첨했다.
마을은 각기 2개 동씩 붙어 한 블록을 형성한다. 처음 입구에서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사과나무-자두나무, 왼편으로는 감나무-석류나무 동을 만난다.
애초 건축의 의도처럼 수국마을에선 아이들이 모든 일상을 스스로 해결한다. 동마다 아이들이 '엄마'라 불리는 수녀와 출퇴근하는 보육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생활한다. 월 300만 원 정도의 생활비로 당번을 짜서 장 보고 밥해 먹고 가계부도 쓴다. 이렇게 하면서 세상 물정도 알고 시장 경제에 조금씩 눈떠 가고 있다.
규율과 통제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기숙사. 하지만 수국마을은 절대 엄숙하지 않다. 약간 분홍빛이 감도는 화사한 붉은 벽돌 집을 대면하면 먼저 포근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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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두나무 동 거실. |
자두나무 동. 실내로 들어서면 책꽂이 겸용 계단을 설치한 천고 높은 거실과 아늑한 다락방이 반긴다. 특히 거실 분위기는 미니 소극장에 온 느낌이다. 이곳엔 TV가 없다. 하지만 빔프로젝트를 쏴 가끔 영화를 보는 곳이다. "아이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공간입니다." 최 미카엘라 '엄마' 수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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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두나무 동 칠판. |
거실에서 다시 반 층 내려가면 다락방이 나온다. 낙서하기 딱 좋은 대형 칠판, 다시 반 층 더 내려가니 줄줄이 방이다. 2~4명이 함께 사용하는 방이란다. 함께 취재에 동행한 강기표 건축가(아체ANP 대표)는 "반 층 올라가고, 반 층 내려가는 형태가 탁월하다. 무조건 깎아 낸 게 아니라 지형의 레벨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이용한 게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동에는 밀어젖히면 옆집과 연결되는 마법의 문도 있다. 마치 정기용 건축가가 설계한 '기적의 도서관'에 온 느낌이다. 이런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간이 동마다 다르게 배치돼 있다. 정소혜(중 3) 양은 "예전보다 공간이 커서 아주 좋다. 특히 거실에 있는 수납공간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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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상에서 본 수국마을. |
아이들의 활동량을 늘리기 위해 동선을 일부러 늘려 놓고, 마을 가운데엔 넓은 마당도 두었다. 소통의 공간으로 한옥 건축을 살린 사랑방도 있다. 사랑방 아래 지하 마당과 옥상엔 나무 데크를 깔아 놓아 오르락내리락하며 놀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설계자의 세심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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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방 앞 쉼터 공간. |
수국마을은 복지시설의 틀을 깼다. 종전 시설 생활은 개인 공간은 없었고 아이들끼리 친밀감도 약했다. 또, 선후배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섞여 사니 종전보다 유대감도 더 생기고 친밀도도 높아졌다. 아이들의 해 밝은 표정이 이를 말해 준다.
셀리나 수녀는 "전기료, 수도료 등 아껴 쓴 돈으로 독거노인도 방문하고, 이를 통해 나눔과 행복감을 아이들이 느끼는 것 같아요. 시설에 있다는 부끄러움도 없어지고. 입주할 때는 아는 친구들도 초대하는 걸 보고 잘했구나 느끼죠. 그래서 앞으로 여건만 되면 남은 시설 공간도 이렇게 바꾸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수국마을 아이들의 미소와 표정을 보면 청순하면서도 싱그러운 수국꽃을 닮았다.
새로 만든 수국마을이 사람을 살리고 그 안에서 사는 이의 행복을 만들어 가고 있다. 건축이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수국마을에선 잔잔한 수국꽃 향기를 느낀다. 우리 건축의 작은 희망도 함께 보았다.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