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피난 설비 체계를 다시 살펴보자
/최지희 경성대 교수 여성학·주택환경학

깊은 바다는 거대한 생명을 삼키고도 말이 없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파도는 정확한 시간에 밀려오고 밀려간다. 자연의 무심함이 새삼 놀랍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훨씬 넘었다. 바다 밑으로 스러져 간 젊은 생명들에게 가지는 미안함과 살아남은 자로서의 괴로움이 국민적 트라우마로 지속된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좌절과 분노에만 머무를 순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또 다른 '세월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재난에 대비한 피난 설비 체계를 점검해 보고 대책을 마련해 보는 것도 제2의 세월호를 방지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상시 행동 패턴은 보통 때와는 달라
사람들은 화재가 나거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인다. 독일의 드레스덴 기술대학 디르크 헬빙 등은 위기 속에서 개인의 행동을 계산해서 집단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탈출 속도는 평소에 비해 떨어지며, 장애물이 있을 경우 더 크게 떨어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불안·초조 심리가 탈출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예기치 않은 극심한 혼잡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야구장 축구장 같은 군집 장소에서 발생하는 압사 사고 등이 그런 예이다.
이런 실험 결과들을 모아 규명한 사람들의 비상시 대피 행동에는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첫째, 인간은 늘 사용해 왔던 출입구나 계단으로 향하는 잠재적 행동을 가진다. 이러한 행동 양식은 위기상황과 맞닥뜨릴 때 합리적 판단보다 무의식적 행동을 유발한다.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인간은 원래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는 회귀 본능이 있다. 화재 발생 때 처음 들어온 길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행동은 이런 연유에서다. 셋째, 돌발상황 때 눈앞의 사람만 따라가는 양상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앞서 가던 사람이 길을 잘못 들어설 때 함께 낭패를 보게 된다. 넷째, 화재가 나면 화장실이나 욕실 같은 좁고 폐쇄된 공간을 찾는 경향이 있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부산의 한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그런 장면이 목격됐다. 엄마가 어린 두 자녀를 감싸고 함께 화를 당한 곳이 이 아파트 화장실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는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점에서 집단적 행동양식을 고려한 피난시설 구축과 안전의식 고취는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다. 최근 부산시소방본부의 공동주택 피난시설 현황 조사는 그런 점에서 시의적절한 조치다. 소방본부는 현재 경량식 칸막이와 하향식 피난구, 대피공간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피난시설을 파악해 각각에 맞는 대피 방법을 알려주고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또 며칠 전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이 발표한 '화장실을 이용한 거주공간 대피공간 활용기술'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평가받고 있다. 이 방안은 아파트 내의 화장실을 불연재로 마감하고 문 표면과 문틈에 물 분무장치를 설치해 유사시 화장실 내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다만 이 방안은 불이 났을 때 전기 설비가 녹아내려 전동장치가 작동불능에 빠질 경우 얼마나 실용성이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러나 23층 이상 고층아파트 화재 발생 시 진압 및 구난 장비가 거의 없는 부산의 현실을 감안할 때 새겨들을 만하다.
방치되는 아파트 피난시설 활용 극대화를
아파트 각 가정의 피난 대피시설 활용 극대화도 좋은 방안의 하나다. 이 시설은 1992년 이후 시공된 아파트마다 설치돼 있다. 옆집 대피용 발코니 경량 벽체와 비상계단 등이다. 하지만 이들 시설은 주민들이 잘 모르고 있거나 물건을 쌓아 놓는 창고처럼 방치되고 있어 유사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실제 지난해에 발생한 모자 참사 화재도 발코니에 경량 벽체가 있는 사실을 몰라 당한 참변이었다. 홍보와 법적 규제가 절실한 이유다.
우리 사회는 세월호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져야 한다. 특히 안전부문에 있어선 더욱 그렇다. 관계 당국이 앞장서서 새로운 피난 설비 체계를 구축함은 물론이고 우리 국민도 안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에 걸맞은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많은 생명을 삼키고도 입을 다문 채 말 없는 바다처럼 자신에게 닥치지 않은 일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는 그런 행태가 되풀이된다면 우리의 안전과 미래는 보장 받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