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어떤 전시회-'노 디렉션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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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의 갤러리는 고요했다. 맞은편으로 경복궁 담장이 보이는 출입문을 들어서자 첫 번째 회화가 눈에 띄었다. 작품 제목: '널 먹기 위해 입을 벌린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림 앞에 선다. 철제 난간과 창문과 가로등과 닫힌 문들. 도시 풍경임이 분명한데 전체 이미지가 흔들리고 기우뚱거리며 비틀려 있다. 그런데도 엄청난 에너지와 역동성이 느껴진다. 또 다른 작품, '스테이지 다이브'. 크기가 4m에 이르는 이 회화는 내면의 지진을 표현한 듯 이미지가 일렁이고 휘어지고 휘몰아친다.

뿌리를 모르는 원초적 상처
해외 입양인의 슬픈 전시회

성공한 해외 입양인은 극소수
저소득층 복지정책 강화해
우리 아이들 우리가 지켜야

전시회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건 우연히 신문기사를 읽고서였다. 세계적인 화가로 돌아온 한인 입양인, 진 마이어슨. '노 디렉션 홈' 개인전. 언론에 종종 소개되는 입양인의 성공스토리라고 여기기엔 그림에서 풍기는 기운이 기묘하고도 강렬했다. 전시회 제목은 밥 딜런의 노래, '구르는 돌멩이처럼'의 가사에서 따왔다. '구르는 돌멩이처럼 돌아갈 집 없고 아는 이 없네.' 1972년 인천에서 출생하여 4살 때 미국 미네소타로 입양된 작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입양인 친구들과 어딘가 닮은 모습이었다.

요즘 다시 해외 입양인 친구들과 활발하게 소식을 주고받던 참이었다. 2년 전, 친부모를 찾기 위해 방한했지만 별 소득 없이 벨기에로 돌아갔던 한 친구는, 우여곡절 끝에 지금 DNA를 확인하는 과정에 있다. 또 다른 친구는 지인의 출생지에 가족 정보가 남아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해왔다. 몇 년 전, 드디어 친모와 상봉한 그 친구는 이런 식으로 주변의 입양인들을 내게 소개하곤 한다.

진 마이어슨 작가의 경우처럼, 나의 입양인 친구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이 나라를 떠났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우리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1970년대와 80년대에 해외 입양아 숫자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전쟁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1953년에 처음 시행된 해외입양정책이 어찌하여 그 시기에 호황기를 맞이한 것인가는, 1981년의 사회복지 예산이 전체 예산의 2.9%였다는 사실에서 해답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정부는 복지대상의 아동을 해외로 내보냈고 그 결과 예산을 절감하고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쪽에서 자랐으니 그만큼 성공하지 않았느냐'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을 떠난 입양아는 약 20만 명. 언론에 소개되는 극소수의 성공사례를 제외하면 수많은 아이들이 거주국에서 인종차별과 부적응과 가난을 겪으며 고통스럽게 살아왔다.

국내의 친생부모가 아기를 포기하는 이유는 경제적 궁핍, 가정 폭력, 한부모에 대한 사회적 편견 등 매우 다양할 것이다. 중앙입양정보원에 따르면 최근에는 가정해체로 인한 요보호 아동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가정해체의 주원인이 경제문제이고 보면, 결국 저소득층과 한부모를 위한 사회복지정책의 강화가 필요할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우리가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진 마이어슨의 작품은 얼핏 보면 황량한 도시 풍경을 그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회화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그의 작품들은 모두 내면의 장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작품 제목: '4차원의 향수병을 앓는 우울'. 어지러운 색의 소용돌이 속으로 시공간이 허물어지고 뭉개지고 일그러져있다. 입양인의 원초적 상처가 드러난, 슬픈 전시회였다.

황은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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