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 메고 떠난 남인도 기행] 25. 담백·고소한 쌀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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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고 굽고 발효시키고… 마법처럼 무한한 쌀의 변신

쌀과 렌틸콩을 하루 전에 배합하고 맷돌에 갈아 반나절 발효시킨 이들리를 찌고 있다.

"유럽인들이 수증기를 보고 증기 기관차를 만들 때 우리는 푸투와 이들리를 발명했지. 우리가 더 위대하지 않아? 증기 기관차야 여행 갈 때나 어쩌다 한번씩 타는 것이지만 푸투와 이들리는 매일 아침 우리와 함께하잖아!"

케랄라 사람들이 농 섞인 자부심으로 자주 하는 말이다. 주로 아침 식탁에서 쌀의 다양한 변신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남인도 먹거리들이 여기에 다 몰려 있다. 담백하고 고소한 쌀 먹거리는 향신료를 싫어하는 외국인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인도에 처음 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먼저 골라주는 음식이기도 하다.

쌀가루, 코코넛 껍질에 찐 '푸투'
렌틸콩과 배합해 발효시킨 '이들리'
코코넛 소스 곁들이면 맛 그저 그만
구운 '도사'는 수백 가지 종류 자랑

남인도 음식의 본고장 타밀나두
웬만한 음식점이 모두 맛집
식탁마다 소스 양껏… 인심도 후해


쌀 요리는 크게 발효 요리와 찜 요리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푸투가 대표적인 찜 요리이고, 벨라 아펌·도사·이들리가 대표적인 발효 요리다. 푸투는 쌀가루를 뭉쳐 코코넛 가루와 섞어 쪄서 먹는 가장 간단한 쌀 요리다. 푸투를 찌는 그릇은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릇이 없을 경우에는 딱딱한 코코넛 속껍질에 찐다. 코코넛 속껍질에 찐 푸투는 마치 공기에 푼 밥을 엎어놓은 것 같다. 푸투는 병아리콩 요리나 바나나와 함께 먹기도 한다. 달콤한 바나나 푸투에 갓 튀긴 고추 부각을 곁들이면 천상의 콤비를 이룬다. 벨라 아펌은 쌀을 발효시켜 반죽한 뒤 오목하게 파인 그릇에 구워내는 음식이다.

보기에도 귀여운 아펌을 설탕을 넣은 코코넛 우유와 함께 먹는 것도 내가 좋아하는 아침 중 하나다. 코코넛 하나를 짜도 많은 양의 우유를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코코넛 우유는 귀한 음식이다. 

고급 생선인 카리민을 양념한 뒤 바나나 잎에 싸서 찐 카리민 폴리차드.
이들리는 쌀과 렌틸콩을 하루 전에 배합하여 맷돌에 갈아 반나절 발효시킨 음식이다. 푸투, 아펌, 이들리 모두 차트니라고 부르는 코코넛 소스에 곁들여 먹을 수 있다. 차트니는 코코넛을 강판에 갈아서 취향에 따라 고추, 향신료, 튀긴 겨자씨를 넣어 걸쭉하게 만든 국물 요리다. 예전에는 편편한 돌 위에다 재료를 넣고 일일이 빻아서 만들었다. 손으로 빻아서 만든 맛과 믹서에 돌린 맛은 당연히, 확연히 차이가 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손맛 차트니를 맛보기 위해 부인에게 손으로 만들어 달라는 남편도 더러(?) 있다.

도사는 그 종류가 수백 가지에 달한다. 이들리와 배합하는 방식은 비슷한데 다른 점은 이들리는 찌고 도사는 굽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우리가 전을 부치듯 도사를 취향에 따라 두껍거나 얇게 부친다. 가장 대중적인 마살라 도사는 각종 채소와 감자를 으깨어 만든 마살라를 곁들인 것이다. 에르나쿨람 시에는 200여 종류의 다양한 도사를 파는 '파이 도사'가 유명하다.

요즘엔 어딜 가나 맛집 소개가 빠지지 않는데 나도 생애 처음으로 케랄라의 맛집을 소개할까 한다. 트리슈르의 '바라트'와 콜리코드의 '사가르'다. 이 두 곳은 지역주민이 즐겨 찾는 일반적인 '호텔'이다. 인도에서는 고급 식당을 레스토랑이라 쓰고, 일반 식당을 호텔이라 부른다. 바라트는 트리슈르 바타꾼나탄 중심부에 있다. 카운터에 앉아 있는 주인아저씨는 점잖은 콧수염을 기른 초로의 신사인데 과묵한 성격이다.

사가르는 콜리코드에 위치하고 있다. 콜리코드는 예로부터 도둑이 없고 인심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콜리코드 지역을 상징하는 사람들은 택시기사와 오토릭샤 기사들이다. 인도 여행을 다녀보면 여행 중 가장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오토발라(오토릭샤 드라이버)임을 알 것이다. 바가지요금은 물론이거니와 단거리는 잘 가지도 않고 가까운 곳을 멀리 돌아가는 잔 속임수를 쓰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콜리코드에서는 이런 일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콜리코드 오토릭샤 조합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다. 미터기를 반드시 써야 하고 늦은 밤 여성들이 귀가할 때 책임지고 문 앞까지 데려다 줘야 한다.

이런 콜리코드에 어울리는 식당이 사가르다. 돈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들은 무료로 식사를 할 수 있다. 문 닫을 시간이 되면 남은 음식을 배곯는 노숙자들에게 대접해준다. 바라트와 사가르는 꼭 한번 다녀가길 바란다. 인정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맛도 근방에서 최고다.

다만 밥때에 맞춰 가면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 줄은 문 앞에서 서는 것이 아니라 밥 먹는 사람 뒤쪽에 선다. 처음엔 누가 뒤에서 기다리는 것이 불편할 테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해 보시라. 혹시라도 맘 좋은 현지인이 자리를 먼저 양보해줄지도 모른다. 남인도 음식의 본고장인 타밀나두 지역은 애써 맛집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웬만한 가게는 다 맛있다. 부엌이 허술해도 음식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소스도 아끼지 않고 통째로 식탁마다 올려놓고 원하는 만큼 덜어 먹게 하는, 인심도 후한 곳이다.
과일 야채 샐러드.
더운 열대인 남인도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음식이 발달해 있다. 코코넛, 라임 주스, 농그를 비롯한 열대 과일은 갈증을 해소하고 땀으로 과도하게 배출한 수분과 염분을 보충해 주는 데 도움을 준다.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은 '모르'다. 모르는 우유를 계속 저은 후 유분을 걷어내고 레몬즙을 넣어 발효시킨 음료다. 모르는 소화를 촉진시키고 더위를 식혀주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모르는 전통치료에서 스트레스로 머리에 열 받은 사람들의 머리를 식혀주는 약재다. 더위에 지쳐 피곤해진 몸에 모르가 들어가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설탕을 넣으면 달콤한 주스가 되고, 소금을 넣으면 갈증 해소 음료가 된다. 모르를 거대한 단지에 담아 두고 사람들이 마실 수 있게 하는 축제도 있다. 이때의 모르는 막걸리와 색깔도 비슷하고 마신 뒤 캬~하고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것도 비슷하다.

케랄라에서는 나그네나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는 일꾼을 위해 '아타니'라고 부르는 담벼락을 군데군데 쌓았다. 이 공간은 어른의 어깨 정도 높이로 쉴 때 짐을 내려놓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손쉽게 짐을 질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버스 정류장 한 구간 정도 되는 거리마다 아타니가 있어 버스 정류장 이름에 아타니가 들어가는 곳이 많다. 아타니 옆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르를 준비해 놓곤 했다. 땡볕을 온종일 걸어 다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고 아타니 그늘에 쉬면서 모르로 목을 축이면 고단한 노동의 시름을 잠시 잊을 수 있었으리라. 케랄라 사람들은 마음 짐을 덜어 주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사람들도 아타니라고 부른다. ttappun@hanmail.net


변영미

문화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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