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가 열전] 38. 초인 보컬리스트 임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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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이의 모든 것을 무장해제하는 '극강의 목소리'

오랜 기행과 은둔 생활을 접고 대중 앞에 선 임재범. 무대 위에서 내뿜는 그의 강렬한 사자후는 카리스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큰 울림과 위로를 준다. 페이퍼 크리에이티브 제공

가창력을 갖춘 신인이 등장할 때마다 늘 그의 이름은 비교우위의 대상으로 언급된다. 경이로운 보컬과 극강의 감성, 그리고 광기. 굴곡과 요철로 가득한 비주류의 삶으로 회자되는 역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상 공전절후의 보컬리스트 임재범이다.

■록의 세계로 빠져들다


프로필상 1963년 서울생인 임재범은 사립 중대부속 초·중학교와 서울고를 다녔다. 본인은 1962년생 범띠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의 동창들이 1966년생(또는 1967년생)이니 임재범은 또래의 친구들보다 4년이나 늦게 입학했다는 얘기다. 훗날 유명 아나운서 출신인 부친 임택근과 이복동생인 손지창과의 가족사가 화제에 오르고 임재범이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지낸 사실이 알려지며, 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유년 시절 그는 쾌활하고 반듯한 학생이었다. 중3 때 이미 키가 180㎝ 가까이 돼 학생 연대장과 규율반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시나위 1집 참여 메탈 보컬 포효
밴드 외인부대·아시아나 거치며
공전절후의 보컬리스트로 우뚝
대마초 사건·방송 중 잠적 등 기행
'나가수' 이후 대중적 인기 활짝


서울고 진학 후 본격적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당시 서울고 교내 서클밴드 '센세이션'을 이끌던 신대철은 임재범의 존재를 알게 됐지만, 만남은 없었다. 이후 1983년 신대철은 재학 중 안준섭(베이스)·김정휴(드럼)·주준석(보컬)과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를 결성한다.

고교 재학 시 불발된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1985년, 신중현이 건립한 국내 최초 록 전문 공연장인 이태원 '록 월드'에서 이뤄진다. 대기실에서 튜닝하던 신대철의 기타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 임재범에게 '시나위' 합류를 제안한 것. 그해 임재범은 '시나위'에서 노래를 시작하고 1986년, 마침내 국내 헤비메탈의 시조 '시나위'의 데뷔앨범 'Heavy Metal Sinawe'(1986)가 발매된다. 국내 헤비메탈 그룹의 존재를 언더그라운드가 아닌 메인스트림에 선포한 첫 창작 헤비메탈 음반이었다.

이 앨범은 초대 보컬 고(故) 주준석에 이어 김종서·이병문·임재범까지 걸치는 홍역을 치른 뒤 발매됐다. 초반부 '크게 라디오를 켜고', '남사당패', '젊음의 록큰롤' 등 3곡의 보컬은 이병문이었다. 이후 임재범으로 재녹음된 노래가 익히 알려져, 이병문 버전은 매우 희귀하다. 이례적으로 10만여 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앨범은 특히 군대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초대 보컬 주준석에게 바치는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가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임재범은 곧 단기사병으로 입대하게 되고 '시나위'의 프런트 맨 자리는 김종서에게 넘겨준다.

1987년 임재범은 '부활'의 기타리스트 이지웅과 '다섯손가락' 출신 베이시스트 박문일, 드러머 손경호, 기타리스트 손무현이 의기투합해 슈퍼밴드 '외인부대'를 결성한다. 1집 'FL 외인부대'(1988)를 발표하고 '쥴리 Julie'란 곡이 큰 인기를 끌지만 임재범과 손무현의 탈퇴 후 2집의 실패로 인해 밴드는 해체한다.

1989년 당대를 풍미하던 여러 록 밴드가 모인 프로젝트 앨범 'Rock in Korea'(1989)에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짝을 이뤄 'Rock in Korea'와 'Same Old Story' 두 곡을 올린다. 특히 'Same Old Story'는 임재범의 최전성기 시절 목소리가 담긴 명곡으로 꼽힌다. 이후 김도균이 영국으로 음악 여행을 떠나면서 임재범도 합류한다. 영국인 연주자 2명과 함께 '사랑(Salang)'이라는 밴드를 구성해 6개월 정도 활동하며 영국 BBC 방송에도 출연한다.

국내에 돌아온 임재범과 김도균은 김영진(베이스)·유상원(드럼)과 함께 드림팀 '아시아나'를 결성해 활동한다. 슈퍼세션을 담은 수준 높은 연주와 함께 영국에서 레코딩한 단 1장의 명반 'Out On The Street'(1990)만을 남긴다. 훗날 임재범은 "사실 음악에 진짜 빠져 있었던 건 '아시아나' 시절이 끝이었다"고 고백했다.

■은둔 접고 세상 밖으로

1991년 발매한 솔로 1집 'On The Turning Away'(1991)는 '이 밤이 지나면'의 빅 히트로 공식 집계로만 6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다. 그러나 임재범은 당시 라디오를 진행하다가 사라지는 등 기행과 사생활 문제로 수차례 논란을 빚었다. 1993년에는 대마초 사건 등으로 방송 출연 규제를 받기에 이른다. 은둔과 칩거 생활을 반복한 지 4년여 만에 두 번째 앨범 'Yim Jae Beum II'(1997)를 발표하지만 대중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당시 박정현이 1집을 준비하면서, 임재범 2집에 수록된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듀엣으로 녹음해 수록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CF 배경음악으로 삽입되면서, 정작 가수의 행방은 묘연한 가운데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듬해 임재범 앨범 가운데 최고로 평가되는 3집 'im jae bum Ⅲ'(1998)을 발표한다. 하드록으로의 귀환으로 앨범 콘셉트를 잡고 전 곡의 작곡에 참여했다. 박정현도 영어 작사를 도우며 코러스로 참여한다. 휘몰아치는 임재범의 보컬과 세션들의 역동적인 연주, 매끄러운 레코딩까지 그야말로 3박자가 고루 갖추어진 수작이었다. 그러나 임재범은 발매 후 바로 잠적했고, 평단의 극찬과는 달리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타이틀곡 '고해'만이 뒤늦은 인기를 얻어 지금까지도 남자들의 애창곡으로 자리매김한다.

1998년 5월 시작한 그의 4집 앨범 작업은 오랜 진통 끝에 2000년 5월에야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솔로 4집 'Story Of Two Years'(2000)는 타이틀곡 '너를 위해'가 영화 '동감'(2000)의 주제가로 사용되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해 7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다. 같은 해 14년간 음악 여정을 총정리해 19곡을 재편곡·녹음한 베스트 앨범 'Memories'(2000)로 음반 시장을 뜨겁게 달군다. 이듬해 10살 연하의 뮤지컬 배우 송남영과 2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시나위'의 1집과 프로젝트 앨범 '록 인 코리아', 단 하나의 음반을 남긴 '아시아나' 앨범과 임재범 솔로 3집(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2004년 다시 앨범 전곡에 참여하며 다양한 악기 편성과 장르를 접목한 5집 'Coexistence 공존'(2004)을 낸다. 10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데뷔 15년 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열고, 무대를 호령하는 군주로서 강렬한 사자후를 선보인다.

2011년 임재범은 음악 생활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TV 방송 출연을 한다. MBC '나는 가수다'에서 '너를 위해', '빈 잔', '여러분' 단 세 번의 공연으로 "야수가 부르는 처절한 희망의 찬가"란 평가를 받으며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킨다. 더불어 리메이크 앨범 '풀이 Free'(2011)를 발표한다. 한 장의 CD에는 김정호·남진·윤복희·임창제·양희은 등 선배 가수들의 역작을 편곡해 수록했고, 또 한 장의 CD에는 딥 퍼플·이글스·유라이어 힙·엘튼 존·스팅·스티비 원더 등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뮤지션들의 곡들로 채웠다.

이듬해 김형석의 프로듀싱으로 6집 'To...'(2012)를 발표한다. 타이틀곡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비롯해 펑키한 사운드와 임재범 특유의 걸쭉한 보이스가 어우러진 'Dream of Vision' 등으로 수놓은 역작이었다.

이후 오랜 침묵을 걷어내고 2015년 10월 'After The Sunset:White Night'(2015)를 발표한다. 음악 인생 최초 록 넘버 11곡을 임재범만의 감성으로 리메이크했다. 더불어 데뷔 30주년 기념 앨범에 걸맞게 윤도현·박완규·소향·김태우·이홍기·은가은·김신의(몽니)·앤·태연·다운헬 등 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한 헌정곡들로 채워졌다.

위력적인 보컬 카리스마를 거쳐, 이제는 가슴에 담아 부르는 노래로 우리를 녹다운시키는 초인. 그 단 하나의 이름 임재범이다. -끝-

최성철·페이퍼 크리에이티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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