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궁궁을을, 을들이 함께 만드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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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의 '학교 비정규직 문제해결 촉구' 기자회견 모습. 연합뉴스

조선 시대 유명한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는 "난리를 피할 만한 곳은 '궁궁을을(弓弓乙乙)'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동학혁명 때 농민군 지도자인 녹두장군 전봉준은 '궁을'이라고 쓴 부적을 태워 군사들에게 마시게 했다고 한다. 대종교나 증산도 같은 민족종교들에서도 궁을가(弓乙歌)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궁궁을을'이 도대체 무슨 뜻이길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약할 '약(弱)'자를 풀어 쓴 말이 바로 '궁궁을을'이라는 것이다. 가진 자들에게 핍박받고 사는 약자들이 힘을 합쳐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저 민간에 내려오는 옛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 해석이 옳다고 생각한다. 을들이 힘을 합쳐 만드는 사람 사는 세상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을들이 서로 경쟁하다 못해 서로 미워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어서 참 슬프다.

가진 자들에 핍박받는 약자들
힘 합쳐 세상 바로잡자는 뜻

비정규직 가장 많은 곳 '학교'
기간제 교사 절반이 담임 맡아
교사 정원 문제는 장기 해결과제
을들 모여 교육 개혁 만들어보자

비정규직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정규직이 많은 직장은 어디일까. 몰랐던 분들에게는 뜻밖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로 학교다. 학교에는 교사 이외에도 경비원이나 환경미화원, 영양사 등 많은 분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다. 이뿐만 아니라 교사 가운데도 20% 가까이가 비정규직이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기간제 교사는 4만 7633명에 이른다. 더 놀라운 일은 이들 가운데 거의 절반(49.9%)이 담임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담임은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 가운데 하나다. 그 일을 기간제 교사들이 맡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그런데 학교 비정규직과 기간제 교사 문제가 불거지자 남의 일 보듯이 딴청을 부리고 있다.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출범한 이 정부가 도대체 몇 개월이나 지났다고 벌써 이 모양인지 참 씁쓸하다.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는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반대 여론이 적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해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자는데 누가 반대할까.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예비 교사들과 임용교시에 합격해 학교에서 일하는 정규직 교사들이다. 이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임용고시를 치르지 않고 정규직 교사가 되는 것은 불공평하며, 임용고시에 합격하지 않은 교사들의 자질과 능력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담임 업무를 맡고 있는 기간제 교사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주장이다. 이분들이 임용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이유는 자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명박, 박근혜 정부 동안 신자유주의를 좇아 구조조정이나 교육개혁을 한답시고 10년 동안이나 제대로 신규 교사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실업 문제가 극한에 이른 요즘 예비 교사들의 불안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비 교사들이 오해하는 일은 그들의 임용과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는 그다지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다. 신규 임용 교사 수를 늘리기 위해 지금 근무하고 있는 기간제 교사 4만 7633명을 모두 해고해야 할까. 그럴 경우 교육 현장의 혼란은 더욱 커질 터이다. 어차피 학교 현장이 기간제 교사들을 필요로 하는 동안에는, 그들이 비정규직으로 남든 정규직이 되든 신규 임용 교사 수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당연히 교사 정원 문제는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추진해 가야 할 문제이다. 그러니 을들끼리 내 영역 네 영역을 나누는 슬픈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이참에 교육 현장의 모든 을이 힘을 합쳐 제대로 된 교육개혁의 미래를 만들어 보자.

조준현

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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