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영원한 사회운동가 조점동 씨 "행복한 노후? 누군가를 위한 실천으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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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점동 애기애타 작은도서관장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이 걸린 관장실에서 작은도서관 설립 과정과 운영 현황 등을 설명하고 있다.

지역 사회운동사(史)에서 조점동(70)이란 이름은 돌올하다. 부산 지역 문화공동체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기러기 문화원'과 '좋은 세상' 발간, 나눔재단 설립, 남구 자원봉사센터 운영 등 그가 일군 성과는 부지기수다. 그런데 한창 일할 나이인 57세 되던 2006년 6월 그는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듬해 밀양으로 귀촌했다.

사람들은 조점동의 존재를 차츰 잊어 갔다. 조점동도 부산과 인연에 애써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 사회운동가는 영원한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밀양 산골에 살면서도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뜨거움을 주체하지 못했다. 사회 변혁과 발전을 위한 봉사와 희생의 삶을 여전히 살고 있었다.

가난 탓 초등학교 겨우 졸업
10대 때부터 독서운동 시작

생업으로 차린 문방구 한 옆
'기러기 문화원' 간판 걸고
2005년 나눔재단도 설립

밀양으로 귀촌, 다시 사회운동
'애기애타 작은도서관' 이끌어

■고희에 여전히 사회운동 펼쳐

최근 밀양시 상남면 조남길 400(남동마을) 밀양신협 3층 '애기애타(愛己愛他) 작은도서관'에서 조점동 관장을 만났다. 도서관은 흥사단 밀양지부와 사무실을 공유하고 있는데, 조 관장이 흥사단 밀양지부장까지 맡고 있기 때문이다.

"저처럼 한물간 사람이 취잿거리가 되나요? 부산서 이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조 관장은 예의 넉넉한 미소로 기자를 편안하게 맞이했다. 고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고 기운 넘치는 모습이었다. 목소리와 행동에도 젊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긴장과 절도가 배어 나왔다. 그가 역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왜 작은도서관입니까?"

단도직입의 질문에 조 관장은 조곤조곤, 진지하게 설명해 나갔다.

"제 일생 역점을 두고 해 온 게 독서운동 아닙니까. 밀양에서도 그 일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조 관장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 1000여 권으로 2015년 12월 밀양시청으로부터 작은도서관 인가를 받았다. 이어 이런저런 인연을 통해 책 3000여 권을 더 구매했고 현재 40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90여㎡ 도서관에는 사방 벽마다 책이 빼곡히 꽂혀 있고 열람실 책상 위에도 책이 흘러넘쳤다.

작은도서관은 열람실 개방은 기본이고, 흥사단 밀양지부와 공동으로 각종 문화행사를 열고 있다고 했다.

작은도서관은 밀양시청으로부터 매년 300만 원을 지원받는다. 하지만 장서 구매로 지출 항목이 정해져 있다. 조 관장은 사재 30만 원을 보태 매년 330만 원어치의 책을 구매하고 있다. 늘그막에 금전적 이익도, 별다른 명예도 없는 작은 도서관에 천착하는 이유가 뭘까?

■못 배운 한을 독서운동으로 승화

연초에 열린 작은도서관 토크 콘서트의 한 장면.

애기애타 작은도서관 제공
조 관장의 일생 행로를 알고 나면 애기애타 작은도서관은 그냥 도서관이 아니라 그의 뜨거운 눈물이요, 벅찬 호흡이요, 뛰는 맥박임을 알 수 있다.

조 관장은 전북 임실군 운암면 광석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그는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이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다. 소년 조점동은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신열을 앓아야 했다. 동년배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또 읽었다. 버려진 신문과 책 조각이 그가 세상을 알아 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 가운데 10대 후반에 읽은 도산 안창호 위인전은 조점동의 마음을 온통 흔들고 만다.

"그때부터 도산의 가르침대로 평생 살기로 마음먹었지요. 무실역행은 제 삶의 대원칙이 됐습니다."

책을 통해 세상에 눈을 떠 가던 그는 약관 17세에 마을 4H 클럽 회장을 맡았다. 당시 '마을 문고'를 열었는데, 그의 독서운동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는 군 제대 후 이장을 맡아 새마을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무거운 지게 일을 반복하면서 무릎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더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결국, 고향을 등져야 했다.

1975년 처가(김해)와 가까운 부산으로 온 그는 국제상사 현장 말단 노동자로 입사했다. 여기서도 그는 여공들을 대상으로 독서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비닐 포장지 공장, 새마을금고 등을 거친 그는 1980년대 초 부산 남구 문현동에 가족 생계를 위해 작은 문방구를 차렸다. 그의 회고를 들어 보자.

"1984년 6월 1일입니다. 문방구 한 귀퉁이에 '기러기 문화원'이란 간판을 걸었지요. 제 손때가 묻은 300여 권의 책을 비치하고 이웃들에게 빌려주기 시작했어요."

기러기 문화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1986년 사회단체로 등록했으며, 2년 뒤 인근에 별도 공간을 얻어 도서관을 재개관했다. 이어 지역 유지 등의 참여 속에 1995년엔 사단법인으로 발돋움하면서 사업 영역도 크게 확장했다.

기러기 문화원은 1997년부터 남구자원봉사센터 위탁 운영도 해 오고 있다.

조 관장은 2005년엔 '나눔재단'을 설립, '마음·시간·재물 나누기' 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깨끗이 물러난 뒤 새 길 개척

그러나 조 관장은 2006년 6월 기러기 문화원 원장에서 물러난 뒤 이듬해 홀연 밀양으로 귀촌했다. 2007년 11월엔 '나눔재단' 대표직에서도 물러났다. 자신이 '대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직들에서 깨끗이 손을 뗀 것이다.

"제가 할 일은 거의 다 했으니까요. 더 미련을 두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게 도산의 가르침이기도 하고요."

그는 천생 사회운동가이다. 밀양으로 이사 와서도 와해한 밀양 흥사단 부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작은도서관을 통한 독서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동네 경로당 총무를 맡아 격주로 어르신들 목욕시켜 드리기와 음식 대접하기를 몇 년째 진행해 오고 있다. 문화·역사 유적지 답사 모임인 '밀양 향초회'와 천주교 남밀양성당 남산공소의 주요 직책도 맡아 봉사와 헌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한 긍정 에너지와 실천으로 뜨거운 노후를 보내고 있는 조점동. 그는 노후의 도래가 두려운 이 땅의 중·장년들에게 돈이 없어도 행복한 노후가 얼마든지 가능함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기자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무학(無學)의 제가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하고 인정을 받는 것은 도산이 말한 실천력이죠.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는 일이라면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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