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울산 마지막 대장장이 박병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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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쇠도 더 단단하게… 65년 한결같은 '세월 망치질'

울산 언양매일대장간 주인 박병오 씨가 화로 앞에서 일하다 포즈를 취했다. 그는 65년째 대장장이 생활을 해 오고 있다.

울산 울주군 언양읍 언양 전통시장(알프스시장)은 오일장(2, 7일)이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인파로 북적댄다. 시골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기장 등지에서 가져온 싱싱한 수산물이 좌판에 흐드러지게 깔리고 호객과 흥정의 목소리가 왁자해진다. 장돌림들이 모처럼 제 세상을 만나는 것도 이날이다. 봄날 오일장에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잡담들도 풀려 더욱 시끌벅적하다.

견습생 거쳐 20년 월급쟁이 생활
40대 초반 언양서 대장간 차려
곡괭이·호미 등 100여 가지 생산

기계화 밀리고 중국산에 치여
주변 대장간 모두 문 닫아

잡초 생명력 보며 권태기 극복
대장암 수술 받고도 일에 몰두
쉼 없이 걸어온 '장인의 길'

박 씨가 직접 만든 각종 농기구.
■울산에서 유일한 대장간

언양장의 활력을 더욱 부추기는 곳이 있다. 탕탕탕 망치 두드리는 소리, 푸우푸우 풀무 돌아가는 소리, 쨍쨍쨍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 시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언양매일대장간이 시장의 활기를 풀무질한다. 농사철이 다가온 4월의 대장장이 손놀림은 더욱 빨라진다.

지난주 울산의 마지막 대장간인 언양매일대장간 주인 박병오(77) 씨를 만났다. 일부러 무싯날 찾아갔다. 며칠 전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박 씨는 미리 선수를 쳤다. "시간을 오래 낼 수는 없소." 장날 찾아가면 타박 맞을 게 뻔했다.

농촌인 언양읍에만 예전에 5~6개의 대장간이 있었다. 이제는 울산을 통틀어 언양매일대장간이 유일하다. 대다수 대장장이가 세상을 등지거나 늙어 손을 놓았다. 박 씨는 "기계화에 밀리고 중국산에 치어 다 사라졌지. 나만 이렇게 오기로 버티고 있는 거요"라며 무심코 내뱉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꿋꿋하게 혼자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화덕에서 쇠를 달구고 단조 해머로 형틀을 잡은 뒤 모루 위에서 모양을 완성하는 일련의 수작업이 오롯이 박 씨의 몫이다.

"사람이라도 좀 쓰지 왜 혼자 하느냐"고 물었더니 "노는 사람은 있어도 이 일 하려는 사람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터뷰 도중에도 짬짬이 손님들이 찾아 왔다.

언양에서 주말농장을 한다는 김 모 씨는 "밭에 둔 곡괭이를 누군가 훔쳐 갔다. 자재상에 가면 물론 구매할 수야 있지만, 아무래도 대장간 물건이 더 야무지고 정감이 가서 사러 왔다"고 말했다.

동남아 계통의 외국인 4명이 와 식칼을 흥정하고는 그냥 가 버렸다. 그러자 박 씨는 "한국 사람들이 참 나쁜 것만 가르쳐 줬어. 외국인들은 무조건 깎는 것부터 배워요. 다 우리 탓이지만…"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비로소 대장간 앞에 나열된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괭이, 쇠스랑, 갈고리, 호미, 낫, 삽, 가래, 도끼…. 그 종류만도 100가지는 족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공장에서 만들어졌거나 중국산 제품들도 놓여 있었다. 대장간에 웬 중국산?

박 씨의 대답이다. "다 늘어놔야 효자인지 효부인지 알지." 무슨 말이지? 손님들이 비교해 봐야 자신이 만든 물건이 좋은 줄 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박 씨의 거칠고 투박한 손.
■일요일도 국경일도 없이 매진

박 씨의 대장장이 인생은 올해로 65년째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대장간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독히도 가난했지. 상급학교 입학은 꿈도 꾸지 못했어. 먹고 사는 일이 급했으니까. 그래서 울산의 한 대장간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그곳에서 3년간 견습생으로 일을 배웠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뼈 빠지게 일했지만,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단다. 요즘 기준으로 본다면 고약한 노동력 착취다. 그러나 그는 악착같이 일을 배웠다. 그때부터 20년간 월급쟁이로 대장장이 일을 했다. 그사이 결혼도 하고 자식(2남 1녀)들도 낳았다.

그는 워낙 성실한 데다 손기술이 좋아 조선소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지만, 거절했단다. "대기업에 들어가 한 가지 일만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대장간 일은 종합적이잖아. 무엇보다도 '가방끈이 짧아' 대기업에서 일을 잘해 낼 자신이 없었어요."

박 씨는 20년간 월급쟁이 생활을 끝내고 40대 초반에 처가가 있는 언양으로 와 대장간을 차렸다. 그게 벌써 40년 가까이 된다.

타고난 대장장이인 그에게도 권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래전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한여름이었어요. 40도가 넘는 화덕 앞에서 해머질을 하느라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했어. 아무 생각 없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뙤약볕에 작은 풀 한 포기가 눈에 들어오지 뭡니까. 그때 퍼뜩 깨달았지. 저 여린 잡초도 더위를 견디고 악착같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데 내가 이 일을 포기한다면 풀보다 못하지!"

돈오점수라고나 할까. 그는 그 일 이후 대장장이 일에 일생을 걸자고 작정했다. 일이 힘들다고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묵묵히 세월을 망치질했을 뿐이다. 3년 전에 대장암 수술도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지독한 일벌레다. 40년 가까이 한결같이 대장간 문을 열었다. 일요일도 국경일도 없다. 1년에 문을 닫는 날은 딱 4일. 설날 2일 추석날 2일이 전부다. 오죽했으면 대장간 이름에 '매일'이라는 수식어를 넣었을까. 그는 해외는 물론 국내 여행도 가 본 적이 없다. 울산에서 첫차로 출근해 해가 지면 문을 닫고 귀가한다. 왜 이렇게 일 중독에 빠진 걸까?

"대장장이인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찾아왔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없으면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 아니겠소?" 명쾌한 답변이다. 자신이 만든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 헛걸음할까 봐 걱정돼 매일 문을 연다는 것이다.

벌써 해거름이었다. 박 씨는 "문을 닫아야 한다"며 인터뷰를 마치자고 했다.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데만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듯했다.

마지막으로 대장장이의 손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거리낌 없이 두 손을 내밀었다. 거칠고 투박했다. 손마디는 턱없이 굵었고 손톱은 누렇게 변색돼 곧 빠질 듯했다. 손을 잡으니 꺼칠꺼칠한 소 발바닥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저 손에 얼마나 많은 쇠가 두들겨 맞고 제 쓰임새를 찾았을 것인가. 두드림을 통해 그 자신의 삶은 얼마나 더 단단해졌을까!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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