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한개마을] 고택 사이 돌담길 느릿느릿 걸으며 즐기는 여름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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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개마을 맨 꼭대기에 있는 월곡댁 사랑채 전경. 월곡댁은 지형의 기울기를 반영한 멋진 기단이 돋보이는 집으로,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의 생가이기도 하다.

성주 한개마을에는 가옥 70여 채가 있으며, 이 가운데 응와종택을 비롯해 교리댁(경북 민속문화재 제43호), 한주종택(〃 제45호), 월곡댁(〃 제46호), 진사댁(〃 제124호), 도동댁(〃 제132호), 하회댁(〃 제176호), 극와고택(〃 제177호) 등 고택과 첨경재(경북 문화재자료 제461호), 삼봉서당(〃 제463호) 등 모두 10점의 지방문화재가 밀집해 있다. 고택들은 흙돌담의 실핏줄을 따라 돌기처럼 흩어져 있다. 담은 집을 가두고 나누었지만, 핏줄은 끊을 수 없었던 걸까. 성산 이씨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히고설켜 일가를 이뤘으며 응와종택의 '독서종자' 철학을 바탕으로 집마다 학문과 절개가 성성한 인물들을 다투듯이 배출해 냈다. 그러므로 한개마을을 돌아볼 때는 고택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집안에 얽힌 내력과 인물에 천착해야 제대로 된 탐방을 하는 셈이다.

옹기종기 모인 70여 채 가옥엔
경북 지방문화재 10점이 밀집

애틋한 자식 사랑 담긴 교리댁 등
곳곳에 소박한 풍경·이야기 가득

애틋한 부성애를 품고 있는 교리댁의 '귤화위지' 탱자나무.
■교리댁 탱자나무

마을 중심에 있는 진사댁을 시작으로 서쪽으로 교리댁, 응와종택, 월곡댁이 층층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하회댁, 극와고택, 한주종택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한 집 한 집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서서, 눈과 귀를 활짝 열고서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개마을의 속살을 만져보는 방법일 터이다.

진사댁 옆 광대바위에서 출발해 제일 먼저 만나는 집이 교리댁이다. 교리댁에는 아름다운, 그러나 애절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교리댁 마당 안쪽에는 수백 년 된 굽은 탱자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이 탱자나무는 원래 귤나무였다. 귤화위지(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의 살아 있는 사례다. 교리댁은 응와종택 바로 아랫집이다. 두 집안의 연은 깊고도 기구하다. 남인 출신인 응와 이원조는 늦둥이인 막내아들(셋째) 귀상(龜相)을 노론 집안인 교리댁에 양자로 내줬다. 이 양자가 홍문관 교리를 지내 교리댁으로 불린다.

응와는 늦둥이 막내아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제주목사를 마치고 한개마을로 돌아올 때, 제주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준 귤나무 3그루를 아들들에게 한 그루씩 나눠줬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교리댁 귤나무만 탱자나무가 돼 뜨거운 부정(父情)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리댁에서 또 하나 놓칠 수 없는 것은 대문에 붙어 있는 '神茶(신다)와 鬱壘(울루)' 입춘첩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벽사의 한 방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금지됐다고 한다.

교리댁을 지나 응와고택을 들른 뒤, 이 마을의 맨 꼭대기에 있는 월곡댁으로 간다. 월곡댁은 1911년 이전희가 처음 건립했다고 한다. 지형의 기울기를 반영한 멋진 기단이 돋보이는 집이다. 이 집은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의 생가로 유명하다.
하회댁 대청마루에서 바라본 앞마당 모습.
■산길 따라 바라보는 용마루


교리댁을 지나면 소나무가 울창한 야트막한 산길이 나온다. 시원한 골바람을 맞으며 늦더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까치발을 하면 월곡댁과 한주종택 담장 너머로 아름답게 펼쳐진 고택 용마루들을 아슬아슬 관찰할 수 있다. 한개마을 앞으로 전개된 참외 비닐하우스들도 눈에 들어온다.

한주종택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한주종택은 1767년(영조 43년) 돈재의 둘째 아들 이민검이 창건하고 1866년 한주 이진상이 중수한 건물이다. 한주정사(寒洲精舍)라는 정자가 있는 구역과 안채·사랑채가 있는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한주 이진상은 응와 이원조의 조카로 조선 말기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한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이란 도발적인 학설을 주창해 기존 성리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의 제자 주문팔현(洲門八賢)들이 나서 학설을 전파했고 결국 한주학파를 형성했다.

한주의 아들인 대계 이승희, 손자인 삼주 이기원·백계 이기인 등은 일제에 저항해 독립운동을 전개, 삼부자가 모두 건국훈장을 수훈할 정도로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이 크다. 그 외 남부형 가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도동댁, 큰 고방이 아름다운 하회댁, 왜정에 항거한 충절이 서린 극와고택 등도 각자 융숭 깊은 집안 내력과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고택 체험을 할 수 있는 진사댁의 장독대
■소슬한 밤 바람


한개마을은 국가 지정 민속마을 중에서도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입장료가 없고 마을 입구에 상업시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고택에 후손들이 살림을 살고 있고 대체로 개방적이어서 탐방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한개마을에서 고택 체험(민박)을 하는 곳은 진사댁, 취아대댁, 우산댁, 왜관댁 등 4곳. 기자는 진사댁에서 하룻밤 묵었다. 2인 기준 5만 원, 4인 기준 10만 원이므로 비교적 저렴한 편이다. 대부분 방에는 에어컨이 있어 무더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진사댁에는 종부 이술이(85) 할머니가 3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다. 과거에는 숙박객들에게 아침까지 제공했는데,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식사를 못 해줘 미안하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얼마나 열심히 집을 가꿨는지, 넓은 마당과 화단이 깔끔하다. 세월을 간직한 장독대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밤이 깊어지자 슬그머니 퇴청으로 나온다. 한낮에 그토록 맹렬하던 더위도 물러가고 계곡 바람이 겨드랑이를 파고든다. 제법 서늘하다. 매미 소리는 사라지고 성성한 귀뚜라미 소리에 실려 가을이 깊어지고 있는가 보다.

창공엔 보름달이 휘영청 걸렸고, 간간이 들려 오는 개 짖는 소리와 국도변에서 차 멀어지는 소리가 길손의 심사를 어지럽힌다. 성주는 '별고을'이라,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그 속도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데 나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헐레벌떡 달려온 게 아닌가, 상념에 젖는다.

근심·걱정을 잠시 손에서 놓고 보니 잠의 깊이도 깊어진다. 푹 잤는가 싶었는데 시계를 보니 새벽 5시다. 때마침 닭 울음소리가 여명을 불러와 여닫이창이 희부옇다. 시골 아침은 도시보다 훨씬 분주하다. 긴 옷을 챙겨 입고 고샅을 나선다. 집마다 벌써 인기척이 들린다. 어제 제대로 보지 못한 고택들을 기웃대며 찬찬히 다시 들여다본다.

돌담과 흙돌담길의 멋스러움을 카메라에 담으며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이 생각난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의 길이지만, 한개마을의 추억만으로도 여름 한 철 찌든 삶의 무게를 거뜬히 짊어질 듯하다. 한개마을 고택 체험과 각종 체험 프로그램 문의 054-933-4227.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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