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카페 보스토크에서 일어난 자발적 실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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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살의 패션 디자이너, 남자는 우울증으로 매우 아프다. 동네 카페 보스토크를 가끔 찾은 지 7년 전. 쥔장에게 생각을 전해왔다. 겨울이 되면 아픔이 더 깊어진다고, 적어도 춥지 않은 곳으로 떠나겠으니, 자신의 모든 것들을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쥔장은 보스토크에 모여 작당하는 게 일상인 청춘들과 머리를 맞댔다. 남자의 집을 정리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알약, 쓰다만 치약, 가재도구 등 살림살이에서부터 생활영수증, 메모, 우편물 등 그가 살아온 서사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들이 가득했다. 청춘들은 그것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이름은 '자발적 실종'으로 정했다. 전시회 동안 남자가 남긴 물건은 모두 사라졌다.

카페 보스토크 이용 청년들
'우울증·번 아웃' 디자이너 위해
'자발적 실종' '특수청소' 이색전

사용한 물건 등 삶의 흔적 조명
청년의 팍팍한 현실 기록·분석
실존적 인문활동 담은 책 기대돼

직업 현실에 대한 한계와 디자이너로서 일가를 이루지 못한 자책이 결국 병이 된 사람. 삶과 함께했던 흔적마저 내려놓았던 남자였지만, 물건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전시회 풍경을 보자니, 갑자기 섭섭하더란다. 자신의 흔적들이 남들에겐 필요한 물건이 되는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남자가 남긴 우울증의 유산들이 누군가에게는 쓰임새가 있다니. 관객들이 열광한 것은 물건의 기능 아닌, 남겨진 남자의 삶의 흔적들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궤적들이 소중해지기 시작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떠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페인에 머무는 그가 우울증약을 완전히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남자가 떠난 얼마 후, 여자가 찾아왔다. 남자의 전시회를 봤다는 그녀는 자신도 그렇게 해 달라 했다. 서른일곱 살의 디자이너였다. 여자는 열정을 다해 일해 왔지만, 사회는 그를 쓰고 버렸다고 했다. 젊은 날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지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그는 번 아웃(burn out) 상태란다. 두 번째 전시회를 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작 힘든 건 옮기는 것과 청소였다. 그래서 전시회 이름을 '특수청소'로 정했단다. 여자도 떠났다. 실제로 특수청소는 현재 일본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직업영역이다. 주로 연고 없이 고독사 한 사람의 뒷정리를 해주는 일종의 청소업이다. 정리와 청소의 대가로 사자가 남긴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방식이다. 보스토크에 모인 청춘들은 달랐다. 두 번째 전시회 특수청소를 마치고 나를 초대했다.

자발적 실종이 남긴 특수청소에다 전시회라는 유쾌한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들이 준비한 피피티(PPT) 자료는 정말 놀랍다. 사회현실과 삶의 환경 속에서 청년들이 마주한 니트, 히치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좌절과 분노 등의 이야기를 주저 없이 끄집어냈다. 오늘을 사는 청년들이 부딪힌 현실을 숨김없이 기록하고 분석했다. 헬 조선, 스펙 사회, 갑과 을, 수저론, '아프니까 청춘? 왜 청년은 아파야 하는 거야, 대충 살자'를 외치는 무민세대, 직업 사춘기, 창업에 대한 두려움, 노동력 착취와 상상력 수탈, 퇴사파티 여는 사람들, 중독사회와 침묵, 학자금 파산 등 청년의 현실이 나아지지 않으면 한 해 10만 명 정도가 인간증발되는 일본의 통계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유추해 냈다. 보스토크 청년들의 접근과 해결방식은 매우 인문적이다. 인문학보다는 실존적 인문활동이다. 카페 보스토크는 이 전 과정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 계획이다. 이 기록은 미래의 인문자산이다. 장소성이 터무니라면 인문은 사람무니인 셈이다. 그 속에 남겨진 삶의 구체적 흔적들에 가치를 발견해 내는 것이 인문의 시작일 게다. 두 개의 자발적 실종사건에서 사람무니를 찾아내고 소통과 나눔까지. 이들은 이미 고수다. 책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그 끝이 궁금하다.


차재근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문화협력 위원회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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