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선] 1과 99
/강은교 시인

올 12월 나는 사방에 송년회 제의를 하느라 바쁘다. 가끔 만나는 동생에게도 와인이랑, 양초, 케이크를 준비할 테니 둘이서 송년회를 하자고 성화를 하고, 저마다 바쁜 몇몇 문학 친구에게도 뜬금없이 송년회를 제의하고, 심지어 아랫집 부부에게도 송년회를 하자고 제의할까 생각하는 참이다. 그전에는 시간만 빼앗기는 것 같아서 절대 가지 않던 송년회, 그런데 올해는 왜 이럴까. 동생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의 답변은 이렇다. "내년에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
산다는 게 너무 아슬아슬한 요즘
올핸 예년과 달리 송년회도 자청
문인 모임에서도 화두는 '양극화'
1% 안 돼도 99%들 껴안고 싶어
아무튼 요즘은 산다는 게 너무 아슬아슬하다. 지하철 수리를 하다 지하철에 끼어 죽은 젊은이. 가방 속에는 컵라면만이 있었다지. 컨베이어벨트에 깔려 죽은 젊은이, 온수 보일러가 터지는 도로,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말인 싱크홀…블랙홀이 아닌, 그러나 블랙홀보다 훨씬 가까운. 선로 탈출한 KTX, 사고투성이 지하철. 한이 없다.
'일할 능력이 있는 데도 '그냥 쉰다'고 답한 인구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인건비가 부담스러워 사업장에 무급으로 가족을 동원하고 있는 자영업자 수가 2008년 금융위기 수준으로 많아졌다.' 어떤 신문의 보도는 삶의 아슬아슬함이 싱크홀뿐이 아님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런데 송년회를 어디서 하죠?" "몇 사람 안되는데, 멋있는 레스토랑 같은 데가 좋지 않을까요? ○○레스토랑이 어때요?" "거긴 너무 비싸지 않아요? 시인들 형편에. 아니, 그보다 누구 멋진 집을 제공할 분 없어요? 그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아뇨, 내가 와인이랑 케이크 살게요. 음식은 없어도 돼요. 아무튼 외국 영화 같은 데 보면 집에서 송년 파티도 하고, 심지어 결혼식도 하던데?" "요즘은 그렇지도 않대요. 거기도 양극화가 심하다잖아요. 1%가 99% 위에 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다 보니 작가 박영한의 소설이 생각난다. 그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에는 언덕 위에서 도시의 수많은 집들을 망연히 내려다보면서 저 많은 집 중에 내 집은 없구나, 하고 중얼거리는 한 청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작가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는 겨우겨우 마련한 중년 소시민의 셋방을 그 소설의 처음 장면으로 그리고 있다. 하긴 이런 예는 한국문학 특히 60, 70년대의 소설에서는 부지기수로 나온다. 그런데 2018년인 오늘에서도 거의 똑같은 이야기들이 뉴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저 한숨이 나온다. 그 시대의 양극화는 아직 그대로인 것이다. 오히려 심화되었다.
"어디 그뿐이에요? 수도권과 지방의 양극적인 차이는 어떻고요? 수도권의 잘사는 동네의 아파트 값은 지방에서는 쳐다볼 수도 없잖아요? 교육은 어떻고요. 문화는요?" "아무튼 이젠 지방이라는 개천에서 용은 나올 수 없다잖아요?" "용이 나올 수도 있다구요. '방탄소년단'도 있잖아요?" "문학도 안그래요 , 유명 문인들, 특히 시인 중엔 지방에 사는 이들이 많잖아요?" "문학은 1%가 아니라, 99% 중의 하나니까 그렇죠, 안 그래요?"
우리는 모두 씁쓸한 미소를 던진다. 그러자 누군가 엉뚱하게 말한다. "나는 늘 걱정이야. 방탄소년단의 그 꽃미남 소년들, 늙으면 어떻게 해? 걸그룹도 곧, 늙어서 아줌마가 될 텐데…." "별걱정을요. 요샌 60이 돼도 소녀 같을 수 있어요. 온갖 성형 기술들이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러니 아름다움도 이젠 양극화의 문제에요."
우리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송년'이라는 주제를 벗어난다. 하긴 송년회를 예전에는 망년회라고도 하지 않았는가. 오늘을 고이 보낸다는 미명 하에 실은 오늘을 어제의 뒤로 던져 버리는 송년회, 그런데 우리가 오늘을 던져 버리려는 걸까, 그 오늘이 우리를 던져 버리는 걸까. 그 어느 것이더라도 올 12월에는 '특별히 다정한 송년회'를 하고 싶다. 모든 99%들을 껴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