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본적지를 가다] 상. 부산역~남포역
과거와 현재 잇는 상상력의 미로
부산 동구 중구 서구는 부산의 뿌리이기에 본적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중앙동 사십계단을 올라서면 벽화 건물 양쪽으로 인쇄소들이 몰려있다.
5월 중순까지는 산불방지 기간이다. 입산이 금지된 근교산을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당분간 부산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는 부산의 원도심을 걷기로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원도심이라 불리는 초량동, 영주동, 동광동, 광복동, 보수동, 부평동, 남포동은 부산을 있게 만든 뿌리이기에 나는 이들 지역을 부산의 본적지라고 부른다. 그동안 부산 사람들을 먹여 살려온 곳이라 그렇게 불러도 전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출발지서 만나는 초량 외국인거리
중구 접어들면 사십계단·인쇄골목
백산로엔 문화예술인 단골 선술집
보수동 책방골목서 뿜는 책 향기
다양한 먹거리 자랑하는 깡통시장
한 시대 풍미한 밀다원은 흔적만…
복잡한 준비물 없이 언제 어디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심이다. 목적지가 따로 없기에 출발 장소가 바로 목적지가 된다. 등산 배낭을 메고 도심을 배회한다는 건 꼭 바람난 산꾼 같아 보인다. 편안한 간편복을 입고 도심을 어슬렁거려 본다. 여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이다.
출발 지점을 부산역으로 잡았다. ‘부산역’ 하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장소이기에 식상할 수도 있겠지만 부산역을 기점으로 한 길들은 부산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어 좋다. 부산역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도착점이자 출발점이기 때문에 어느 다른 지점보다 더 많은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부산으로 들어가는 한 지점이고 부산 사람들은 많은 길을 등에 지고 타지역으로 떠나는 그 지점이 된다.
출발은 기차에서 내려 건널목을 건널 때 바라다보이는 ‘텍사스 스트리트’라는 아치가 서 있는 곳이다. 초량 외국인 거리 중의 하나다. 텍사스촌이라고 불리는 지역이며 청소년 출입금지구역이다. 이렇게 건널목을 지나 한 블록 들어서면 왼쪽으로 텍사스 거리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도 길게 이어진다.
초량 외국인 거리
길은 왼쪽이다. 100여m쯤 걸어가면 이번에는 ‘차이나타운’이라는 아치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중국인들이 근거지를 이루고 살아가는 터전이다. SNS를 타고 유명해져 한 시간 가량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작은 만두집도 있다. 그 앞은 벽에 삼국지 인물들이 부조되어 있는 화교 학교다.
그러나 이 거리에는 러시아인들이 많이 방문하다 보니 러시아어 간판이 군데군데 비집고 들어서서 풍경이 차츰 바뀌고 있다. 차이나 거리에는 영화 ‘올드보이’ 촬영 장소라 써 붙인 만두집도 있다. 텍사스 거리와 차이나타운은 외지인들에게는 꼭 둘러봐야 하는 명소가 되었다. 이 거리를 지나면 마주치는 큰길을 지하도를 이용해 건너야 한다. 갈맷길은 중앙대로로 이어지는데 그곳은 자동차 이외에 볼거리가 없어 사실 재미가 없다. 중앙로 뒷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오래된 부산의 정취가 더 맛깔스럽다.
지하도를 건너면서부터는 중구지역이다. 심당요양병원과 마주치면 건물 좌측을 선택하여 오르막길을 힘들이지 않고 오른다. 그 길에는 ‘동광길’ 새 주소가 붙여져 있다. 그 길을 따라 15분 걸으면 동광동 인쇄 골목에 도달한다. 부산의 명소인 ‘사십계단’도 있고 평일이라면 다양한 인쇄문화를 엿볼 수 있다. 사십계단 윗길을 지나다 보면 그 길 끝에 대청로 큰 길이 가로막는다.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을 건너 백산로에 접어들면 왼편 첫 블록 골목에는 부산의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주점 ‘강나루’와 ‘양산박’, ‘계림’이 있다.
백산길은 백산기념관 앞을 지나면 곧장 ‘광복로 7길’이란 이름으로 바뀐다. 그 길은 끝에서 광복동 입구와 마주친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광복로다. 광복로를 따라간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차 없는 거리가 되어 걷기에 한결 수월하다. 요즘은 상권이 부활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주말이면 젊은이들로 거리가 차고 넘친다. 12월과 1월에는 ‘빛의 거리’ 축제를 펼치고 있어 밤이면 각종 모양을 한 화려한 조경이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옛 미화당 삼거리에서 좌측길 즉 충무동 쪽으로 이어가면 세명약국이 보인다. 약국 오른쪽 골목이 먹자골목이다. 출출하다면 이곳에서 당면을 말아 먹거나 김밥이나 국수를 간단하게 먹고 갈 수 있다. 세명약국에서 60미터쯤 가면 대낮에도 환하게 불을 밝혀놓고 조명기구를 전시한 골목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면 국제시장통 초입과 마주친다.
국제시장은 두 블록 건물이 나란히 이어져 몇 개의 공구로 나뉘어 있다. 두 건물 사이 통로로 계속 나가면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소였던 ‘꽃분이네’ 가게가 아직도 숱한 방문객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포토존이 설정되어 있어서 가게에서 물건은 사지 않고 그냥 사진만 찍고 사라지는 이들이 많아 실제로 영업방해를 주고 있어 주인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가게 옆을 따라 직진하면 국제시장통 골목 끝이 국민은행 건물 뒷벽이다.
보수동 책방 골목 모습
은행 앞 건널목을 건너 다시 왼쪽 건널목을 건너면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다. 오래된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거운 책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귀한 책이나 만나고 싶은 책을 주인의 기억 속 서가에서 끄집어낼 수 있다. 수 많은 책들에서 손님이 찾는 책을 어떻게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정해 책방 주인의 능력을 시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책방골목 끝까지 가서 되돌아 나온 중간쯤에서 다시 큰길 쪽으로 나 있는 길로 나서면 건널목이 있고 그 길을 건너면 만나고 싶은 부평동 깡통시장이 나타난다. 깡통시장이란 이름은 1950년 이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제품들이나 외항선원들이 한두 개씩 가져온 밀수품들이 많이 유통되었기에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람들이 찾는 물건은 모두 다 있을 정도로 다양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또한 풍성하고 다양한 먹거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빔당면, 어묵, 통닭, 장어구이, 단팥죽 등 먹거리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개성 있는 음식점과 주점들이 열려있어 먹고 가거나 쉬어 가거나 길을 가면서 여유를 느낄 수 있어 좋다.
가까이 있는 장소라고 눈여겨보지 않았던 가게와 공간들이 새로운 의미를 달고 가슴에 들어오는 걸 느낀다. 인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가게들을 기웃거리면서 풍부한 상품들에 감탄하고 스스로 부자가 된 느낌도 가져본다. 도심에서는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길을 끌고 가도 상관이 없다. 길은 언제나 통하고 언제나 다시 만난다. 여유가 있다면 까페에 들러 차 한 잔으로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아도 좋다. 아니면 비빔당면 한 그릇 후딱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젠 깡통시장도 쇠퇴의 길에 접어든 느낌이다. 수입 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양주나, 커피 등을 어디서나 손쉽게 구입할 수 있기에 굳이 이곳까지 사러 오지 않는다.
어슬렁거리며 깡통시장 가운데 길을 따라 충무동 쪽으로 내려가서 부평로를 건너 포장마차 즐비한 비프광장로를 만난다.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부산의 극장가가 나온다. 거기에는 ‘비프광장’도 있고 그곳에서 광복동 입구 쪽으로 직진하여 남포동 길로 접어든다. 바닥에 새겨진 여러 유명 배우들의 핸드프린팅도 밟을 수 있는 좁은 길에는 휴일에는 사람들로 붐벼 길이 더욱 좁게 느껴진다. 이 남포동 길에는 한국동란 때 피난 내려온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자주 모여 예술을 논했던 ‘밀다원’이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때를 문학인들은 밀다원 시대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때를 기념하는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표지석이라도 세워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끝으로 남포동 길을 따라 계속 나아가면 중앙대로에서 지하철 남포동역 1번 출구를 만난다. 이곳이 종착지다. 이 길 끝에 또 다른 부산 길이 눈 앞에 펼쳐진다.
강영환
시인
강영환 시인/ 경남 산청 출생.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공중의 꽃’으로 등단. 1979년 현대문학 시 ‘천료’,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남해’ 당선. 시집 <칼잠>, <술과 함께>, <붉은 색들>, <다시 지리산을 간다>외 19권, 시조집 <모자 아래>외 2권, 산문집 <술을 만나고 싶다>, 이주홍 문학상, 부산작가상. 부산시인상, 부산시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