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영화사' 엄혹한 시대 오롯이 담은 조선영화의 미장센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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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영화사/이효인 외

1919년 개관한 경성극장의 외관. 돌베개 제공 1919년 개관한 경성극장의 외관. 돌베개 제공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은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에 편입돼 근대사회로 빠르게 이행

해갔다. 이 시기 유입돼 조선 문화의 획기적 변화를 주도한 문물 가운데 하나가 활동사진이다. 바다를 건너 상품으로 유입된 활동사진은 극장을 중심으로 흥행업이 정착하고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92년 인천에는 조선 최초의 극장 ‘인부좌(仁富座)’가 설립됐다.

19세기 말 개항장에 들어선 극장은 전근대 유교 문화 아래 돈을 지불하고 흥행물을 거래하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던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흥행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장소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뒤 조선은 손쉽게 일본 영화산업의 소비지로 구조화됐다. 자연적으로 조선인은 열린 공간에서 전통 연희를 즐기던 구경꾼에서 흥행물을 소비하는 근대적 관객으로 재탄생했다.


1892년 최초의 극장 인부좌 설립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되는 1945년까지

한국 영화의 주요 장면·인물 등 담아


<한국근대영화사>

는 탄생부터 존립까지 근대 한국영화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다. 책은 영화사와 식민지 조선영화 등에 관심이 많은 세 명의 저자가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한국영화의 다양한 근대성 논의를 15년 간 연구 끝에 하나로 엮어낸 결실이다.

활동사진이 유입되고 1892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인부좌가 설립된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주요 장면과 사건, 인물, 영화 운동, 영화 이론, 작품, 관련 기록을 포괄적·종합적으로 기술했다. 책은 1부 ‘영화 유입에서 극영화의 시대까지’(1892~1925), 2부 ‘조선영화의 각축과 새로운 시도’(1925~35), 3부 ‘발성영화 시기부터 전시체제까지’(1935~45)로 구성돼 있다.

저자들은 조선영화는 서구 근대와 일본 근대 사이, 그리고 서구영화와 일본영화 사이에서 만들어진 식민지 근대의 산물이자 기록으로 본다. 일제와 일본 영화산업과 타협하고 경합하며 만들어낸 조선영화의 미장센 속에 조선 근대의 풍경이 오롯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근대영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엿보게 된다. 1903년 6월 23일부터 <황성신문>에는 동대문 안에 위치한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밤 8시부터 10시까지 동화 10전을 받고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것이었다. 새롭고 진기한 볼거리였을 ‘움직이는 사진’을 보러 전기회사 기계 창고 공간에 모여든 조선인들의 호기심에 찬 모습을 상상해보라.

조선 최초의 토키(발성)영화 ‘춘향전’. 돌베개 제공 조선 최초의 토키(발성)영화 ‘춘향전’. 돌베개 제공

1935년 조선 최초의 토키(발성)영화 ‘춘향전’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춘향전’이 제작되기 전, 조선에서는 이미 서구의 토키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영어가 일상화되지 않았던 시절 관객들은 동작에 맞춰 나오는 소리가 더없이 진기했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는 지껄임’에 이내 피로감을 느꼈다. ‘춘향전’의 상영으로 조선 사람의 말이 스크린에서 들리자 극장은 매일 초만원을 이뤘다. ‘춘향전’을 보기 위해 조선의 많은 아녀자들이 아기를 업고 도시락을 지참하여 먼 길을 걸어올 정도였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는 조선인이 제작한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됐고, 조선 영화계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게 된 것은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었다는 상식도 접하게 된다. 발성영화시대에 진입한 1935년부터 해방을 맞이한 1945년까지 엄혹한 시대 조선영화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도 인상적이다. 이효인·정종화·한성언 지음/돌베개/368쪽/3만 2000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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