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촛불 시민 앞에 놓인 또 다른 선택지
/차재권 부경대 정외과 교수
설날 밥상 민심이 심상치 않다. ‘막장 보수’가 되살아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면서, 이러려고 그 엄동설한의 추위를 견뎌내며 촛불을 켰나, 후회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촛불 민심의 마지막 남은 심지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정부·여당이 호기롭게 빼 들었던 적폐 청산의 칼날은 서슬 파란 기득권 세력의 기세에 눌려 두부 한 모 자를 힘조차 없어 보인다.
설 연휴 밥상머리 ‘수구 보수’ 꿈틀
기득권 세력 공세에 정부·여당 휘청
민주당, 합리적 개혁 보수 좌표 잡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전격 도입해
소수정당에 진보정치 공간 열어줘야
촛불이 꿈꾸는 사회 ‘최소한의 길’
왜 정부·여당이 이처럼 총체적 난국에 빠져버린 것일까? 그들의 개혁 의지가 부족한 탓인가? 그렇진 않다. 적폐 청산에 대한 정부·여당의 의지는 과하면 과했지 결코 부족해 보이진 않는다. 문제는 정부·여당이 품고 있는 열정과 이상이 기득권 세력이 지배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득권은 매우 강고한 시스템이다. 오랜 시간 반복된 선택과 행동으로 굳어진 선호 체계인 까닭에 일종의 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강력한 외부의 충격 없이는 제도로 굳어진 선호의 체계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촛불 민심이 강고한 기득권 체제를 무너뜨리는 외부적 충격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여가는 자본의 이해관계 그 자체가 기득권의 근간이다. 따라서 기득권에 발을 디디고 있는 어떤 정부도 그것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분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정권이 들어서면 기업들은 투자를 멈추어 경제시스템의 효율을 인위적으로 떨어뜨린다. 그것은 곧바로 경제 전체의 파이를 줄여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수에 악영향을 미치는데, 현실 경제에서는 각종 지표에 켜진 적신호로 나타난다. 기득권 세력들이 의식하고 움직이는 행동이든 아니든 기득권이 그것을 제약하려는 반대의 힘에 대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학술적으로도 이런 메커니즘을 입증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렇다면 촛불 시민의 입장에서 기득권에 포획당한 이 정부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촛불 시민 스스로가 짜놓은 촛불혁명의 프레임에서 정부·여당을 놓아주는 것이 답이다. 정부·여당이 더는 촛불 시민들이 원하는 적폐 청산의 적장자가 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재벌 중심의 한국판 천민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는 현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각은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의 틀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소득주도 성장이야말로 그런 본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부 개념 없는 보수 논객들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을 마치 사회주의 경제로 가는 마중물인 양 포장하며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그것은 성장과 분배 사이를 오가는 자본주의 주류 경제학이 제시해온 두 가지 진자운동의 한 축에 불과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태생적으로 진보의 아이콘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보수를 보듬고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사이비 수구 보수들을 몰아내고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보수의 본령을 우뚝 세우는 길을 걷게 하는 것은 어떨까? 10여 년 전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구상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민이 아마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정치적 상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필요하다. 더불어민주당이 진보 코스프레를 멈추고 우클릭하면서 보수의 어젠다를 점령해 나가는 동시에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한층 선명한 진보정치를 내세울 수 있는 소수정당들이 제자리를 잡도록 하는 것이다.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추진 의지가 모여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더불어민주당의 주도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전면 도입하는 과정에서 막장 보수를 대표하는 극우 정치세력이 일정한 정치적 지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또한 보수 진영의 교통정리가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리란 보장도 없고, 21대 총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그와 같은 정치적 결단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현재와 같은 정치적 세력균형 상태에서 촛불 시민이 꿈꾸던 최소한의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이 그것뿐이란 것이다. 저급한 보수의 품격 없는 정치에 신물 난 국민들이 설날 밥상을 물리고 오로지 국민의 뜻과 행복만을 생각하고 반영하는 정치의 품격을 되살릴 선택지를 어찌 잡을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