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막막함… 일상의 ‘허공’ 이기는 건 결국 ‘사랑’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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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구원이었다. 마지막 하나까지 잡은 것이 시였고 시를 받쳐준 것은 사랑이었다.”

이정모(사진) 시인의 말에서 녹록지 않았던 시간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었다. 시인은 2012년 간암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왔다.

시인은 “죽음을 이기는 것은 사랑”이란 화두를 던졌다. 이번에 펴낸 세 번째 시집 <허공의 신발>(천년의시작)에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작품들이 많은 이유다. 시집에는 모더니즘 색채가 가미된 신서정시 60여 편을 실었다.

간암 투병 이정모 시인

세 번째 시집 ‘허공의 신발’

신서정시 60여 편 실어

꽃·동백·이슬…

자연 노래한 시 눈길

‘꽃만 보였다//흐르는 피를 보고서 가시를 보았다//바깥이 다 닳은 구두 굽을 통속이 보고 있고//엉덩이 만지다 돌아가는 건달의 유행가 소리도 들린다//영화 같은 순간들이 꽃잎 되어 떨어져 나갔고//내일을 향해 본 듯한 얼굴이 가면을 쓰고 지나갔다//탈을 벗길 수 없어서 물었다//-너 장미 아니지?//바람이 비명의 전부였던 주제에//수만 번 떨어지고도//-무엇이면 어때?’(‘그냥 꽃’ 전문). 시인은 사랑을 꽃에 비유했다. ‘수만 번 떨어’진 꽃은 사랑의 아픔과 좌절을 뜻한다. 하지만 ‘무엇이면 어때?’라며 다시 꽃이 피듯이 사랑의 유효함을 역설한다.

‘저기, 봄바람이 몰려온다//적진을 향해 달려가다가//단칼에 자신의 목을 베어버리는 화랑//뚝뚝 떨어진 선혈이 반역의 증거로 남았다//덕분에 봄은 무사하다’(‘동백’ 전문). 시인은 떨어진 싱싱한 동백으로부터 세속오계란 명분 아래 목숨을 잃었던 화랑을 떠올렸다. 화랑에 대한 애처로움을 포착한 시인은 인류애가 국가보다 위대함을 역설한다.

시인은 매일 등산을 하며 자연과 사물에 대해 더욱 애정이 어린 시선을 갖게 됐다. ‘이슬’이란 작품을 보면 그러하다. 자연에 대한 섬세한 관찰을 통해 이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떨어진 이후를 아는 이슬과 사후세계를 모르는 인간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무지함을 보여준다.

‘이슬에게도 주먹이 있다//일그러지기 싫어 온몸으로 손잡이 만들고//내 한 몸으로 이룬 꽉 찬 세상//출렁이던 그 방도 때가 되면 버릴 줄 안다//물 한 방울이 다른 생의 완성이라고//통쾌한 이별을 반짝일 줄도 안다//너무 늦지 않았나 모르겠다//반짝, 햇살 눈에 넣으며 낙하하는 저 믿음//-일생에 한 번이라도 너희는 떨어진 이후를 아니?//그토록 괴롭히던 공중을 향해//나의 부재를 맛보아라//한 방 주먹을 날리면서’(‘이슬’ 전문).

시인은 이번 시집에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포스트모더니즘 요소가 강한 산문시 ‘숨구멍이 없다’와 ‘버퍼링’도 실었다.

이번 시집에는 사부곡을 노래한 표제작 ‘허공의 신발’을 비롯해 유독 ‘허공’이란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허공이란 알 수 없는 부분이자 허무와 막막함”이라고 했다.

‘죄 중에서 제일 큰 죄는/남의 가슴에 말로 짓는 죄인기라//평생을 욕 한 번 없으셨던 아버지//(중략)//운동화 끌려 오는 소리가 북, 북 소리를 낸다/아버지,/허공을 신발 끌고 가신다’(‘허공의 신발’ 중).

시인은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시를 놓지 않겠다. 시는 내가 빚어내는 단 하나뿐인 예술작품이다. 좋은 시를 쓰면 영혼의 제물을 얻는다”고 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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