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기요·부산요 궤적을 쫒다] 1부-일본에서 찾은 조선 도자 6. 일본도자기의 원류가 된 법기도자기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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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포로 송환 위해 ‘주문다완’ 은밀히 제작”

긴카이다완(金海茶碗). 높이 8.7㎝, 둘레 13.2㎝. 일본 교토 기타무라미술관 소장. 신한균 제공 긴카이다완(金海茶碗). 높이 8.7㎝, 둘레 13.2㎝. 일본 교토 기타무라미술관 소장. 신한균 제공

옛날 도자기 말을 살펴보자. 도자기 만드는 흙을 ‘질’이라 불렀고, 이것을 잘 반죽한 덩어리를 ‘꼬박’ 또는 ‘꼬막’이라 불렀다. 물레는 ‘돌린다’고 하지 않고 ‘찬다’고 했다. ‘꼬막을 물레 차’ 기물을 만들었다. 기물은 그릇, 항아리, 꽃병 등 여러 가지였다. 작업하는 것을 ‘썰질’이라 했다. 물레 찬 그릇을 가마에 넣고 토기 정도의 약한 온도에서 불을 때는 초벌구이는 ‘애벌구이’라 부르기도 했다. 초벌구이에다 그림을 그린 뒤에, 아니면 그냥 잿물(유약)을 입혀 가마에 넣어 높은 온도에서 본격적으로 도자기 굽는 것을 ‘마침구이’나 ‘본불’이라 했다. 본불을 거쳐 완성된 여러 도자기 중에는 사발이 있다. 이들에는 술사발, 약사발, 밥사발, 제기인 멧사발, 찻사발(다완), 그리고 막사발이 있다.

쇼군 다도 스승이 ‘주문다완’ 디자인

후루타 오리베·고보리 엔슈 대표적

오리베 취향의 ‘긴카이다완’

법기리 요지서 사금파리 발견

기록에 김해서 구웠다는 언급 없어

임진왜란후 일본에 대한 반감 고려

동래부서 김해 사기장 데려와

법기리 요지서 비밀리에 만든 듯

막사발이란 뭘까? 일제 강점기에 왜사기 공장이 생겨나면서 우리의 전통 도자기는 맥이 끊긴다. 그러나 우리 백자이긴 하나 값이 싼 극소수의 막사기가 남아 있었다. 막사기는 왜사기처럼 시설투자가 거의 필요 없고 백자 원료를 간단히 구할 수 있는 산간 벽지에서 움막에 흙으로 만든 봉우리 가마만으로 만든 싼 그릇을 뜻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왜사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막사기를 막사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지난 글에서 조선 초기 민가의 제기였고 현재 일본국보인 기좌에몽이도(喜左衛門井戶)라는 조선사발을 일본의 대표적 미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잡기(雜器)’라 주장했다고 한 바 있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에도 알려졌다. 그때부터 일본에서 명품이 된 조선 사발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막사발이라 부르게 되었다. 슬픈 일이다. 그것은 막사발이 아니라 15~16세기 이 지구상의 가장 첨단기술이며, 조선의 얼이 녹아 있는 예술품이었다.

긴카이다완 뒷면. 긴카이다완 뒷면.

우리 옛 사기장들은 도자기를 ‘판다’고 하지 않고 ‘시집 보낸다’고 했다. 사기장은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신(神)은 여자 신이라 믿었고 도자기는 가마 여신의 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동이보다 작은 그릇은 ‘방구리’라 했었다. 놋쇠로 만든 여자 밥그릇을 ‘바리’라고 했는데, 이 바리를 도자기로 만들면 ‘옴파리’라 했다. ‘멍텅구리’는 병의 목이 두툼하게 올라와서 볼품없이 생긴 되돌이병을 말한다.

사발보다 조금 더 작은 것은 ‘보시기’라했다. 보시기보다 더 작은 것은 ‘종지’라 했는데, 초장이나 간장 등을 담아 밥상에 올려놓는데 사용했다. 보시기와 종지의 중간 크기로는 종발이가 있고 대접이 있다.

보시기는 순우리말이다. 보시기를 한문으로 기록할 때는 뭐라 했을까?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외교 창구였던 동래부사의 기록인 <변례집요(邊例集要)>에는 보아(甫兒)라 했다.

일본 측 외교 창구였던 쓰시마(對馬)의 종가(宗家)가 부산왜관에 대한 기록을 시작한 1634년 전까지는 일본의 주문 도자기 기록은 다음의 <변례집요>에 나오는 두 문장밖에 없다.

1611년 3월.

“동래부사 조존성 때 왜인이 서계를 가지고 와서 ①도수 ②다기보아(茶器甫兒) ③와기(瓦器) 등의 물건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④김해의 장인(使金海匠人)으로 하여금 도자기를 구워 지급하도록 하였습니다.”라는 연유를 치계하였다. 1611년 4월.

“우황양구, 응자, ⑤도기(陶器) 등을 구입하기를 원하는 서계를 두왜 귤지종이 가지고 왔습니다.”

①도수는 형태를 미리 틀로 만들어 놓고 그 속에 흙물을 채워 만든 도자기를 말한다. ②다기보아는 찻사발인 다완을 뜻한다. 일본 주문다완의 크기는 대부분 조선의 밥사발보다 작다. 하여 동래부에서는 차보시기란 뜻으로 다기보아라 기록한 듯하다.

일본 주문 사발들을 일본인이 디자인했다 하여 일본 도자기의 원류라 한다고 앞글에서 말했다. 그러면 주문 다완을 디자인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다도를 하는 차인이었다. 차인 중에서도 일본의 지배자인 쇼군에게 다도를 가르치는 다두였고 힘센 권력자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와 고보리 엔슈(小堀遠州)가 있다. 후루타 오리베는 임진왜란과 이후 양산 법기리 요지가 활동하던 1615년까지 일본의 다두였고, 고보리 엔슈는 후루타 오리베를 이은 다두였다. 일본인들은 후루타 오리베의 디자인이라 여기는 것들을 ‘오리베 취향’이라 한다.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 긴카이다완(金海茶碗), 호리미시마다완(彫三島茶碗) 등이 그것들이다. 고쇼마루다완은 앞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긴카이다완도 그 사금파리는 김해에서 못 찾고 양산 법기리 요지에서 그것으로 추정되는 사금파리를 발견했다.

여기에서 필자는 <변례집요>의 기록에 다시 주목한다. ④김해의 장인(使金海匠人)을 시켜 만들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김해에서 구웠다는 언급은 없다.

필자의 생각을 덧붙여 본다. 김해는 왜군이 7년이나 주둔한 곳이었기에 왜군 장수가 조선 사기장을 불러서 자신의 취향대로 다완을 만들도록 시킬 수 있는 곳이다. 일본식 주문 다완을 부탁 받은 동래부사는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식 다완에 숙련된 김해 사기장들을 찾아 그들을 동래부에 있는 가마로 데려와서 주문 다완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였던 당시에는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반일(反日) 감정이 극도로 높았다. 그렇지만 조선 정부로서는 일본에 붙잡혀 있는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서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동래부는 일본에 도자기를 만들어주는 일을 비밀리에 진행했을 것이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본 주문품을 만드는 일은 김해의 가마에서보다 동래부 소속의 가마에서 만드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동래부 소속의 가마는 현재 경남 양산시에 속해 있는 법기리 요지이다. 법기리는 17세기 초반에는 동래부에 속해 있었다.

<변례집요>의 기록을 다시 한 번 보자. ③와기(瓦器)와 ⑤도기(陶器)라는 말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조선시대 도자기 종류를 지칭하는 말이다. 와기는 보통 옹기류 그릇을 말하며, 도기 또는 사기는 분청사기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백자는 무엇이라 기록하고 있을까? ‘자기’라 했다. 그런데 여기선 ‘다기보아’라고만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55년 전인 1537년부터는 전국 어느 가마에서나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중종실록>에서 확인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분청사기는 없어지고 백자만 쓰는 나라가 되었다. 1611년 <변례집요>에는 자기란 표현이 없어도 백자를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긴카이다완의 질(태토)은 백자이다.

그러면 와기와 도기는 무엇을 뜻할까? 필자는 가키노헤타다완을 와기로, 오리베 취향으로 알려진 호리미시마다완을 도기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4월 2일 게재되는 다음 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신한균


NPO법기도자 이사장 사기장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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