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노트] 그 많던 "침묵하지 않겠습니다"는 다 어디로 갔을까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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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화면 캡처 사진=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화면 캡처

[부산닷컴=조경건 기자] "성폭력은 여성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입니다. 앞으로 저희도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2017년 12월 9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 말미에서 유명 남성 인사들이 한 약속이다. 이날 '그알'은 가구업체 한샘에서 발생한 성폭행 문제를 다루며 이같은 캠페인 영상을 소개했다.


영상에서 김동현, 다이나믹듀오, 박준영, 에릭남, 유재석, 이준기, 장항준, 타이거 JK, EXO 카이, 표창원 등 10인의 남성들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절대 침묵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고, '개념남'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이면계약'이었다.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촉발시킨 국내 '미투' 운동은 사회 각계에 파장을 일으켰지만, "절대 침묵하지 않겠다"던 남성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문제가 연예계로 퍼졌을 때도 그랬다. 최근 빅뱅 전 멤버 승리의 성상납 의혹과 가수 정준영의 성관계 영상 불법촬영 및 유포 논란에도 이들의 침묵은 이어졌다. 故장자연씨의 동료 배우 윤지오씨가 고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신의 신상까지 공개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속이라도 한듯 계속된 침묵이 오히려 이들을 '소환'해냈다. '버닝썬'과 장자연 사건 등이 집중 조명받은 3월 들어 트위터를 비롯한 SNS에는 "침묵하지 않겠다던 남자 연예인들 어디갔나"라는 취지의 비판 글이 쏟아지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지만 각종 성범죄 관련 논란에는 숨죽여 지낸 가수 산이와 배우 유아인, 방송인 유병재도 거론됐다. 이들은 소위 '극렬 페미니스트'를 비판할 때는 침묵하지 않아 모순적이라는 비판을 샀다.


반면 일부 여성 연예인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코미디언 심진화는 자신의 SNS에 장자연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는 응원 글을 올렸고, 배우 구혜선도 장자연 사건을 언급하는 글을 남겼다. 김향기는 윤지오씨 SNS 글에 '좋아요' 눌러 응원의 뜻을 전했다.


물론 침묵하는 남성 인사들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작년 2월 트위터에서 안태근과 이윤택의 성범죄를 방관한 자들을 '공범'이라 비판한 표창원은 '뒤늦게라도 한마디 하셨네요'라는 한 누리꾼의 지적에 "모든 사안에 대해 글을 올릴 수도 없고,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존중하자"고 당부했다.


특히 연예인은 특정 사안에 대해 무심코 발언했다가 지나친 관심을 받기 십상이다.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 특성상 생계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FNC엔터테인먼트 소속인 유재석이 같은 소속사 최종훈과 이종현에 대해 언급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저 "침묵하지 않겠다"던 이들의 소신까지도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길 바랄 뿐이다.


다만 일부 남성들의 이중적인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장자연 사건 관련 기사를 보면 종종 "여성단체는 뭐하냐"는 댓글을 볼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댓글 성비 통계를 보면 여지없이 남성의 비율이 높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성범죄 사건을 언급하며 '여성단체는 침묵한다'고 비판하는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적절한 비판은 아니다. 지금까지 여성단체들은 장자연 사건을 포함한 각종 성범죄 관련 이슈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내거나 기자회견을 열고, 재발 방지 및 강력처벌을 위한 입법을 촉구해왔다.


지난 15일 '한국여성의전화'와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대' 등 여성단체들은 윤지오씨와 함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및 고 장자연 씨 사건 진상 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공소시효 연장 등을 통한 진상 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기도 했다.


"여성단체는 뭐하냐"는 지적은 분명 이상하다. 일부 남성들의 분노가 정말 '불의에 침묵하는 것' 때문이라면 비판 대상은 '그알'의 남성들이 되어야 마땅하다. 같은 남성에게 유독 관대하다면, 분노의 이유를 의심 받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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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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