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부산 연극의 진정한 봄
지난달 부산연극제가 막을 내렸다. 2019년 부산연극제는 남다른 관심을 끌었는데, 그것은 창작 초연이라는 무겁고 두꺼운 틀을 실질적으로 해소한 첫해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부산연극제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극단은 초연 수준의 작품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참가 제한은 점차 장애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극단의 동등한 자격과 실력을 겨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 분명 존재했지만, 연극 자체의 특성과 개성을 가로막는 폐습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두 견해는 각축을 벌였지만, 한동안은 전국연극제 참가를 위한 부산 대표(작)를 뽑는다는 명분이 결국 창작 초연이라는 규제를 고수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각종 문제도 이어졌다.
부산연극제, 창작 초연 족쇄 걷어내
새로운 미학적 우수성 발휘 기대
뚜껑 열어 보니 매너리즘 도사려
기존 작품이 보유한 능숙함
무대화 과정서 활기 불어넣어야
초연작을 구하지 못한 극단은 연극제 참가에 애를 먹었고, 급하게 구한 희곡은 무대 형상화 과정에서 심각한 약점을 노출했다. 연기력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극단은 자신(들)의 극단이 손해를 보고 있다며 원망을 쏟아냈고, 미진한 공연 완성도는 관객들의 원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결국 부산연극계는 창작 초연이라는 틀을 스스로를 묶는 족쇄로 간주하고 걷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부산연극제에서 창작 초연과 기성 공연의 비율은 1 대 1 정도였다. 참가 극단의 절반은 기존 공연작으로 참가했으며, 나머지는 극단은 창작 초연작을 선택했다. 기존 공연작의 경우 극단들이 오랫동안 갈고 닦은 레퍼토리인 만큼 상대적으로 더 큰 기대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규제 변화의 중요 이유였던 새로운 미학적 우수성을 보여주면서 창작 초연의 미진한 공연성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매너리즘이라는 강력한 적이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라는 강력한 예술적 대항 장르를 마주하고서도, 연극이 그 명맥을 잇고 스스로의 가치를 확대 심화할 수 있었던 것은 무대 예술이 지닌 생동감 때문이었다. 영화는 누적된 시간을 필름에 투여하여 미학적 가치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 장르에 비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듯 했다. 상대적으로 연극은 시간의 누적에서 약점을 드러내며 태생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필름 속에 거대한 촬영분의 시간(심지어 공간까지)을 누적하는 방식과는 별도로, 배우의 육체에 공들여 쌓은 에너지를 응축하였다가 무대에서 터뜨릴 수 있는 휘발성이 다른 미적 쾌감을 생성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좁게는 두 장르 사이에, 넓게는 여타의 장르와의 사이에서, 상호 공존할 수 있는 방식이 발견된 셈이다. 아니 연극은 애초부터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장르였다.
시간이 흘러 점점 더 영화의 힘은 강력해져만 갔다. 그럴수록 연극으로서는 무대 연기로 휘발될 수 있는 용기와 그때 발생하는 생동감(에너지)을 더 굳게 지켜내야 할 필요도 커지고 있다. 삶의 식탁에는 통조림으로 상징되는 기성 식품도 필요하지만, 갓 지은 밥과 김치의 맛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기성 작품을 통조림 속에 가두려는 욕망에만 사로잡혀서는 곤란할 것이다. 기존 작품이 보유했던 능숙함과 익숙함이 매너리즘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무대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활기가 온전하게 체감될 수 있는 방식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때에야, 창작 초연의 압박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1년 후에 찾아오는 봄에는 부산연극의 진정한 봄도 함께 깃들지 않을까 싶다.
김남석
문학평론가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