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터치] ‘시장 밖 예술’ 프로젝트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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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만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물 만난 고기’라는 말은 있어도 ‘물 떠난 고기’라는 말은 못 들어 봤다. 물고기에게 물은 생명 활동의 조건이자 전제다. 물고기는 물을 벗어나는 순간 생명을 잃는다. 물고기에게 물은, 사람에게 공기와 마찬가지이다.

시장은 사람이 모여 물자를 교역하던 원시 경제의 탄생지이다. 시장은 그러나 사람이 아니라 자본의 지배하에 진화했고, 지역과 국가를 넘나들며 오직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거대 구성체가 됐다.

정태춘·박은옥 데뷔 40주년 기념해

‘한성 1918’서 열린 ‘시장 밖 예술’ 선언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한 현실에 맞서

놀이의 가치로 예술의 존재 이유 증명

그뿐만 아니다. 시장은 사람들이 집결하는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물과 공기처럼 우리 삶 전체에 스며들었다. 가치재인 문화예술마저도 TV나 스마트폰 속에서 손쉽게 매매되거나 교환되는 현실은 산업자본주의가 최정점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 시장은 부단한 혁신으로 유비쿼터스적 상황에 진입했다. 이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가 아니라 “모든 길은 시장으로 통한다”라고 해야 한다. 자본에 예속된 시장은 우리 삶을 범지구적으로 지배하는 신(神)적 기제가 되었다. 시장의 자장(磁場)을 거부하고서는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문화예술이 시장을 벗어나 존재할 수 있다는 상상은 어불성설이다.

지난 주말, 중구 중앙동 ‘한성 1918’에서 작지만 큰 울림의 이벤트가 있었다. ‘정태춘 박은옥 40 스페이스 부산ⅹ2019 시장 밖 예술 프로젝트’ 출범식이었다. 그들은 정·박의 데뷔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자본에 저항하는 반산업주의 문화예술 운동으로서 ‘시장 밖 예술’이란 새로운 깃발을 세운다는 전략을 제안했다. 한때는 ‘시장 안 예술가’로 출발했고 시장 안에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지만, 시장의 틀을 벗어나 예술가적 표현의 자유를 갈망했고 스스로 그 길을 찾아 나와 수십 년을 활동해 온, 정·박의 ‘시장 밖 예술’ 선언은 그들의 삶과 예술이 증명하고도 남는다. 지금의 문화예술정책들이 하나같이 일자리, 금융, 법령, 세제 등 국가주의적 시장의 포섭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매몰된 예술경영론에 머물고 있다.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경계는 여전히 공고하고, 비제도권 예술생태계는 매우 열악하거나 불안하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있어 문화예술마저도 ‘돈’으로만 거래되고 평가되는 현실은 문화예술 후속 세대들의 절망과 탄식 속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문화예술에 있어서 ‘시장의 안과 밖 경계’는 매우 선명할뿐더러 가혹하기조차 하다. “시장 안으로 내몰린 이들에게 시장 바깥에서 오히려 안온한 우리들의 존재”였음은 더 이상 추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문제임을 상기시키면서 “시장 밖에서도 건강한 문화예술이 행해질 수 있음”을 운동화하자는 선언이다. 이 선언의 중심에 정·박이 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전교조 합법화 투쟁, 표현의 자유 쟁취를 위한 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 투쟁, 대추리 미군 부대 전입에 맞선 평화예술 투쟁 등을 해온 그들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문화예술적 경종을 울리며 온몸으로 투쟁을 실천했다. ‘시장 밖 예술’은 산업화의 그늘에서 자본과 권력에 결탁한 시장에 잠식되어 가는 문화예술의 현실에 맞서 싸워 온 정·박 예술 인생에 가장 부합하는 철학이지 않은가?

버닝썬에서 보듯, 한때 잘나가던 아이돌 스타들의 비참한 말로를 문화예술의 가치 인식이나 철학의 부재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문화예술 본연의 존재 이유나 원형을 망각한 채 돈에만 길들고 매몰된 결과라는 얘기다. 문화예술의 본령은 화려한 무대조명이나 거대한 시장 권력에 있지 않다. 오히려, 건강한 삶의 정상에 위치한 ‘놂’에 있다. 최고의 예술은 바로 놀이고, 놀이의 싱싱한 생명력이 문화예술 창조의 원동력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고래와 알타미라 동굴의 들소를 그렸던 화가들이 시장을 생각했을까? 자본에 잠식된 시장이 없었어도 그 그림들은 충분히 충만하고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원시적 생명력을 지닌 예술들에서 오래된 미래를 본다. 어쩌면 자본에 저항하고 시장을 거부하는 문화예술이 전혀 무망한 것이 아니다! 선언문은 낭독되었고, 프로젝트는 진행될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지만, 문화예술은 시장을 떠나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픈 간절한 모험일지 모른다. 발칙한 프로젝트의 성공을 기대한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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