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공감(共感)
/김효정 문화라이프부 공연예술팀장
아들이 꼬맹이 시절, 데리고 외출하는 건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로 느껴질 만큼 힘든 일이었다. 함께 100미터를 가려면 1시간을 잡아야 할 정도였다. 아이 걸음이 느리거나 잘 걷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이는 지나가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를 비롯해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형 누나 아기 등 사람은 당연하고, 꽃 강아지 고양이 나무까지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게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기다려주다가 나중에는 빨리 가기 위해 결국 아이를 끌고 가거나 업고 달려야 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 슬픔
함께하는 공감 필요한 때
공감의 결핍 사회적 위기로
공감 지수 높이는데 관심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집 근처 자주 가던 시장은 늘 사람과 차로 북적거렸다. 어느 날 장 보러 아이와 나갔다가 시장길 한복판에 핀 민들레를 발견했다. 아이는 사람의 발에 혹은 차에 민들레가 밟혀 죽을 수 있으니, 자기가 민들레를 지켜주겠다며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는 게 아닌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결국 급하게 모종삽을 들고 와서 민들레를 집 화단에 이동해서 심어주어야 했다.
아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 건 ‘공감’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이해하고 동의해주는 걸 말한다.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감은 꼭 필요한 부분일 듯싶다.
누구나 어릴 땐 세상 모든 것을 친구라고 여기고 그들과 아픔과 기쁨을 나눈다. 찢어진 인형을 붙들고 아프겠다고 울었고, 쓰러진 꽃을 보며 죽었다고 슬퍼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며 기꺼이 슬퍼하고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며 어릴 때 누구나 가지고 있던 공감은 왜 사라졌을까. 100이었던 공감지수가 마치 바닥까지 떨어진 이들도 많은 듯하다.
얼마전 모 정치인은 세월호 사고를 당한 유가족들에게 “징하게 해먹는다” “지겹다”라는 메시지를 남겨 충격을 주었다.
아이를 먼저 보내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갈 유가족들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이 정치인은 과연 공감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세월호 5주기인 지난 16일 뮤지컬을 관람해 구설수에 오른 오거돈 부산시장의 행보 역시 아쉽다.
부산시장이 부산에 처음 생긴 뮤지컬극장을 찾아 공연을 관람하며 격려하는건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굳이 4월 16일에,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이 뮤지컬을 관람했다는 건 뒷말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이날 시장의 방문이 시설아동들의 관람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시의 공무원들이 오 시장의 뮤지컬 관람을 말리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걱정스럽다. 시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시 공무원들의 공감지수가 그만큼 낮다는 걸 뜻하는게 아닐까.
정치인과 공무원, 공인들의 ‘공감 결핍’은 결국 국민들에게 불행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사실, 공감과 배려의 부족은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끔찍한 사건으로 돌아오고 있다. 층간 소음으로 시작된 이웃간의 분쟁이 살인으로 번지고 교제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사건조차 발생하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초·중·고등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었다. 이렇게 되기 위해 아이들은 일찍부터 공부하고 학원가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이젠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 이상으로,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데 우리 사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공감지수를 높이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여러 연구들은 공감지수를 높이는데 좋은 방법 중 하나로 문화활동을 추천한다. 아티스트들의 메시지에 귀기울이고, 그들의 몸짓과 노래에 울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의 감정에 마음이 열린다.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어느 순간 그 곡을 만든 작곡가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지금 공연을 보며, 영화를 보며,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최소한의 공감지수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teresa@busan.com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