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칼럼] 브란트, 아키히토 그리고 평화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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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논설위원

오는 30일이면 여든여섯의 아키히토(明仁) 텐노(天皇·일왕)가 즉위 30년 4개월 만에 물러난다. 다음 날인 5월 1일부로 쉰아홉의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는 일본의 제126대 일왕에 오른다. 1989년 1월 8일부터 사용된 아키히토 일왕의 연호인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저물고 나루히토의 레이와(令和)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화합되는 가운데 문화가 자라난다’는 일본 측 설명처럼 레이와 시대가 ‘아름답고(令) 조화로운(和)’ 시대가 되길 이웃 나라 한국에서도 기원한다.

내달 1일 새로운 일왕 맞는 일본

아름다운 조화 뜻의 ‘레이와’처럼

이웃 국가와도 평화의 기운 넘치길

‘전범 독일’ 이미지 바꾼 브란트처럼

퇴위 아키히토 일왕도 큰 역할 기대

방한 성사돼 한·일 관계 전기 맞길

연호는 말 그대로 인위적인 시간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 일본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다. 일본인에게 연호가 바뀐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메이지(明治) 유신,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민주주의), 쇼와(昭和) 고도성장, 헤이세이 불황 등 일왕의 연호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아키히토 일왕처럼 ‘생전 퇴위’를 하는 경우는 에도시대 고가쿠(光格) 일왕 이후 202년 만인 데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할 일도 없이 ‘양위’가 이루어져 그 열기는 더 뜨거울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이런 일본의 연호 제도가 부럽다고 했다. 바뀌는 연호를 계기로 국가든 개인이든 ‘재부팅’이 가능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물론 재부팅은 어떤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리셋’과는 다르다.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재건하는 것이 가능할 때 그 의미는 배가 된다. 그런데 일본 연호가 바뀌고, 축제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고 전쟁의 기억과 상처를 간직한 주변국 사람들의 아픔까지 씻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오히려 ‘강한 일본’을 주장하는 아베 신조 총리가 ‘새 시대’를 등에 업고 군사력과 교전권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평화헌법)의 개정 필요성을 거듭 주장하는 등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를 만드는 데 속도를 내는 형국이어서 걱정스럽다.

레이와 연호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학자까지 나서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와(和)’가 있는 상태, 그것은 평화”라면서 “레이와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가까스로 전범 재판을 피한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1946년 1월 1일 ‘인간 선언’을 통해 신성을 부정했다. 그해 11월 공포된 ‘일본국헌법’(신헌법)은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1조)으로 ‘국정에 관한 권한을 갖지 않는다’(4조)고 규정했다. 이전만 해도 일왕은 ‘아라히토가미(現人神·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신)’였지만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일왕이 된 것이다.

‘상징 천황제’가 일본 국민 속에 자리 잡게 된 데는 아키히토 일왕 역할이 컸다. 침략전쟁의 책임자였던 히로히토를 아버지로 둔 탓에 재임 기간 내내 국내외 전쟁 희생자 위령이나 재해 지역 방문을 이어가는 ‘평화 행보’를 보였다. 그는 관례로 행하는 신임 총리 초청 왕실 환영 만찬도 아베 총리 때는 생략했고, 태평양전쟁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등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는 한 번도 찾지 않았다. 주민 9만 4000명을 포함해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최대 격전지였던 오키나와는 11차례나 방문했다. 중국, 사이판, 팔라우, 필리핀 등 태평양전쟁 격전지도 두루 순례하면서 과거 전쟁의 비참한 역사를 잊어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기대했던 일왕 아키히토의 한국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외교부가 지난달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아키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 두 번인가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간무(桓武·737~806년) 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며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강조했고, 한국과 관련이 깊은 고마(高麗·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고약광을 모신 곳) 신사도 참배해 눈길을 끌었다. 1990년에는 한국 지배에 대해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길 없다며 반성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한국 방문과 사죄’의 퍼즐도 그가 풀어냈으면 한다. ‘퇴위 후의 아키히토’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를 방문 중이던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바르샤바 게토 봉기’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에서 헌화를 마친 뒤 불현듯 무릎을 꿇은, 장면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날 브란트가 무릎을 꿇은 것은 수십 초에 불과했지만, 그 어떤 사죄의 말보다 감동적이었다. 브란트의 행동은 전범 국가 독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세계인들의 선입견을 바꾸어 놓았다. 아키히토가 ‘일왕’을 내려놓고 ‘상왕’이 되더라도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을 견제하고 평화를 중재하는 역할은 계속하길 바란다. 다가오는 레이와 시대엔 이런 ‘감동적인 장면’이 현실이 될 지 누가 알겠는가. key66@busan.com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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