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그들, 이젠 공존으로] 1. 의료·복지 울타리가 없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예고 없이 찾아온 조현병, 진단 받던 날부터 고립 시작됐다”

주변 모든 사람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는 망상. 가구 생산 공장에서 총무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 박기수(가명·35) 씨에게 조현병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야 이 ××야!” “널 죽여버릴 거야!”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환청과 환각이 박 씨를 괴롭혔다. 불안감에 몸서리쳤고, 입은 바짝 타들어 갔다. 4년 동안 다니던 직장도, 오랜 친구도 모두 잃었다. 그렇게 박 씨는 ‘정신병자’로 낙인이 찍혔다.

정신 및 행동장애 관련 진단 땐

개인 신상에 ‘F-코드’ 기록돼

취업 제출 서류에 드러나 불이익

퇴원 정신장애환자 연계 체계 없어

사후 관리 없이 방치되는 환자 많아

“치료 체계 개선도 중요하지만

사회 복귀 돕는 시설 마련돼야”

■고립된 그들…도움 없이 ‘홀로서기’

박 씨가 처음 조현병을 진단받은 건 2012년 8월이다. 중증 환자로 분류된다는 말에 외부 접촉이 차단된 안전병동에 입원했다. 대용량 약을 하루 두 번 섭취했고, 약에 취해 온몸에 힘이 빠진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 달 뒤 증상이 호전돼 박 씨는 ‘낮 병원’으로 옮겼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원하는 ‘일일 입·퇴원’을 소위 낮 병원이라 부른다. 박 씨는 1년간 이곳에서 꾸준히 치료를 받았지만, 다른 환자들은 이때부터 ‘고립’되기 시작했다.

“다른 여러 퇴원 환자와 낮 병원에 등록했지만, 한두 달이 지나면서 3분의 1 이상은 병원 치료를 그만뒀습니다. 한 달 치료비 20만 원이 없어 포기하거나, 치료를 뒤로한 채 아르바이트나 학교생활에 바쁘게 지내는 환자가 다수였습니다. 증상이 악화될 우려가 컸지만, 스스로 병원에 오지 않는 이상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치료를 받던 3분의 2 환자도 ‘낮 병원’ 치료가 끝난 뒤 갈 곳을 잃었다. 퇴원 이후 정신재활시설로 연계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박 씨는 어머니가 환자 부모들 모임에서 정신재활시설에 대한 정보를 우연히 듣고 등록하게 됐다. 박 씨는 “낮 병원이 끝난 후 지자체, 병원, 복지시설 어디에서도 사후 관리를 위한 연락이 없었다”면서 “젊은 환자와 달리 돌볼 가족이 세상을 떠난 고령의 조현병 환자들은 방치될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부산의 정신재활시설 ‘송국클럽하우스’에 다니는 조현병 환자가 직접 그린 만화. 일련의 사건 이후 조현병 환자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 탓에 느껴진 불편함을 표현했다. 이상배 기자 부산의 정신재활시설 ‘송국클럽하우스’에 다니는 조현병 환자가 직접 그린 만화. 일련의 사건 이후 조현병 환자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 탓에 느껴진 불편함을 표현했다. 이상배 기자

■“사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양 모(51) 씨는 30여 년 전 제대 후 대학교 복학을 준비하던 중 조현병이 발병했다. 당시 스스로 몸에 큰 병이 생긴 것을 느낄 정도의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증상이 악화될까 두려워 대학을 계속 다닐수도,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다. 결국 부모님 밑에서 20년간 숨어 살다, 40세에 용기를 내고 정신병원을 처음 찾았다. 무려 20년의 청춘을 은둔하며 허비한 것이다. 이제야 직업 훈련을 받고 있는 양 씨는 “그동안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두려웠고, 사회로 돌아가기 위한 어떠한 ‘연결 고리’도 찾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전문가들은 조현병 환자를 위한 사회복귀시설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조현병 환자가 치료를 꾸준히 받으며 사회 복귀 준비를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 씨도 ‘F-코드’ 낙인에 2차례나 취업에 실패했다. F-코드는 정신 및 행동장애에 관련된 진단을 받을 경우, 개인 신상에 기록되는 코드다.

“조현병의 증상 중 대표적인 것이 어눌한 말투인데, 이로 인해 취업을 할 수 있는 곳이 극히 제한적입니다. 노력 끝에 취업장을 정하더라도, 취업 제출 서류에 F-코드가 떡하니 찍혀 있어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장애인 고용 취업장을 가야 하는데, 그곳들도 신체장애인을 선호하거나, 장애인고용센터를 통해 사람을 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사회복귀시설인 정신재활시설은 전국적으로 349곳이 있다. 약물 및 증상관리부터 리더십 훈련 등 취업 지원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그러나 퇴원하는 정신장애인을 연계하는 시스템이 없고, 활동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해 100%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부산의 한 정신재활시설은 1인당 정신장애인 재활프로그램 지원비가 연간 17만 원에 불과하다.

부산의 정신재활시설 송국클럽하우스 유숙 소장은 “지속적인 치료를 위한 의료 체계 개선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정신장애인을 고립과 은둔, 배제 속에서 건져내고 사회 복귀를 돕는 시설들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훈·이상배 기자 lee88@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