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인간의 범위
1990년대 초부터 주말 밤에 방영되어 온 한 장수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방송 직후 큰 화제를 몰고 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각종 사이트 검색어 순위를 바꿀 정도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은 대단한데, 최근 다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동물 실험의 부도덕성을 다룬 프로그램 방영 시 해당 프로그램 관련 주제어가 검색어 순위에서 오히려 밀려나는 특이현상이 일어났고, 유명세를 탔던 전후 프로그램에 묻혀 정작 해당 프로그램은 별다른 파장 없이 사라질 순간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저조한(?) 성적의 프로그램 주제가 ‘복제견’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8세기의 유소년과 19세기 흑인
당대 지배자가 하찮은 존재로 여겨
개들을 학대하는 인간의 논리
과거 인간 학대 독재자와 비슷
개들도 부당한 실험 희생양 안돼
소수 이익 위한 생명체 위협 막아야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은 18세기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지성적인 시기였다고 격찬했지만, 그러한 시대였음에도 ‘유소년’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강요된 노동은 문제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1863년 노예해방 이전까지 ‘흑인’ 역시 인간의 범위 내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로 머물러야 했다. 이 시기의 흑인들은 누군가의 소유물이거나 백인을 위한 피조물이었으며 노동과 학대를 강요받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물건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까 18세기의 유소년이나 19세기까지의 흑인은, 그 시대의 어떠한 인간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인간 범주 바깥의 하찮은 존재였다.
그때 유소년이나 흑인이 그 시대의 지배자들에게는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는 사실은 지금-우리에게 인간 범주 바깥에 위치하는 것에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의 동물들이, 그때의 그들처럼 인간의 범주 바깥에 존재하며, 생명체의 권리를 제약당하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개들을 학대하는 인간들의 논리는 과거 인간을 학대했던 독재자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독재자들은 위계와 층 차로 ‘자신’과 ‘자신이 아닌 이들’을 나누고, 자신에게 복속하는 이들에게는 ‘막대한 혜택’,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곤 했다. 독재자들에게는 경계 바깥의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돌보아야 할 당위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러한 분리와, 우열과, 선별의 시각일 터이다.
사실 우리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자신을 특별하다고 믿었던 일군의 정치세력 다수 민중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을 따르는 소수의 세력만 ‘선택받은 인간의 범주’로 포함하는 국정농단을 스스럼없이 감행했다. 그렇게 ‘선택되었던 인간들’을 다시 ‘보통 인간의 범주’로 돌려놓는데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왜 모든 존재의 기본적인 권리와 존엄성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다시 특정 인간 중심의 과욕에 사로잡혀 하찮은 동물이라는 차별을 손쉽게 용인하는 순간, 곧 그 차별적 범주 내에는 동물뿐만 아니라 버려지고 밀려난 사람들도 담기게 될 것이다. 다시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특정 소수의 이익을 위해 등등해야 할 이 세상의 생명체가 위협받는 세상을 묵과할 수는 없다.
내일 죽어야 할 운명을 처한 개들이라고 해도 오늘 부당한 실험의 희생양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어떠한 인간도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생명체를 마음대로 할 권리를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일 이 점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더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소수에 의해 우리 자신들도 언젠가는 인간의 범위 바깥으로 끌려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는 일관되게 그러해 왔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국 인간의 범위는 인간의 오만이나 포용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지 않을 도리도 없을 것이다.
김남석
문학평론가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