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 변천사] 전 국민 ‘나가수’ 만들어 준… ‘한 평 반 무대’의 놀이문화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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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세월 전 국민의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던 노래방은 1991년 부산에서 잉태돼 전국으로 확산된 놀이문화다. 부산일보DB

평일 한낮에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을 거닐다 건너편 노래방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통유리벽이라 방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 20대 남성 두 명이 신나게 춤추며 열창하고 있다. 다른 방에는 손님 한 명이 홀로 방을 차지하고 있다. 해가 지고 술 한잔 걸쳐야만 마이크를 잡던 문화에 익숙한 이에겐 낯선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 한 번도 노래방을 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2~3번씩 가던 시절도 있었는데…. 회식도 줄고, 친구끼리 모여도 다들 일찍 귀가하다 보니, “2차는 노래방”이라고 외칠 일이 없어진 거다.

1991년 한국형 노래방 부산서 시작

로얄전자오락실에서 설비 첫 개발

주류반입 금지해 가라오케와 차별화

이듬해 노래방 1만여 곳 전국적 신드롬

1990년대 중반 고음질 설비 들어와

2005년 3만 7568곳 절정 이뤄

지금은 혼자 노래방 가는 ‘혼코노’ 대세

긴 세월 전 국민의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던 노래방은 1991년 부산에서 잉태돼 전국으로 확산된 놀이문화다. 부산일보DB 긴 세월 전 국민의 스트레스 해소에 큰 역할을 했던 노래방은 1991년 부산에서 잉태돼 전국으로 확산된 놀이문화다. 부산일보DB

부산, 노래방을 잉태하다.

1990년대 중반 중학생 신분으로 처음으로 노래방을 갔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부산 부산진구 서면 복개천 인근 노래방이었다. 반주에 맞춰 처음으로 친구들 앞에서 덜덜 떨며 노래 실력을 공개했다. 신승훈의 ‘날 울리지마’를 불렀고 곡이 끝난 뒤 내가 음치라는 걸 깨닫고 좌절했다. 10대 중학생이 40대가 됐으니, 얼추 노래방의 역사도 30년 가까이 된 듯하다.

1991년 이 땅에 들어선 한국형 노래방은 긴 세월 전 국민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 노래방은 잉태하고 퍼트린 곳이 바로 부산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상에서 술 한잔과 가무를 곁들일 방법이 흔치 않았다. 선술집에서 젓가락을 두드리며 한 곡조를 뽑거나, 비싼 돈을 주고 가라오케를 찾아가야만 했다.

그러다 1991년 4월 사하구 하단동 동아대 앞 ‘로얄전자오락실’에서 대한민국 노래문화를 뒤흔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 오락실 업주는 컴퓨터 전문가였다. 그는 가라오케 기계를 개조해 사용자가 직접 번호를 눌러 곡을 선택하고, 화면의 가사를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기계를 오락실 내 1.6평짜리 부스에 설치하면서, 한국식 노래방 설비가 처음으로 이 땅에 도입됐다.

요금은 곡당 300원이었다. 요즘 코인노래방도 1000원에 3~4곡 정도 부르는 걸 고려하면 꽤 비싼 편이었지만, 청소년들이 부스 앞에 줄을 섰다.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 광안리해수욕장에 비슷한 방식의 설비를 도입한 ‘하와이비치 노래연습장’이 들어선다. 전국 첫 등록업체이니, 대한민국 1호 노래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12월까지 부산에서만 200여 노래방이 생겼고, 이듬해엔 등록업체가 1만 개 넘으며 전국적인 신드롬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는 줄 아무도 예상못했다.

‘부산은 넓다’의 저자인 유승훈 부산박물관 연구사는 “최초 노래연습장은 주류 반입을 금지해 가라오케 주점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며 “가라오케보다 이용객의 대상과 범위가 훨씬 확장된 것이다”고 밝혔다.

새로운 유행엔 저항하는 이도 있기 마련이다. 민족성이 충만했던 대학생들이 그러했다. 여러 대학의 총학생들이 노래방이 왜색이 짙다고 비판 입장을 밝혔는데, 1991년 말 부산대학교 총학생회가 배포한 문건에는 “노래방은 왜색 풍조이며 소비 향락을 조장한다”, “건강한 학생들의 예술적 감수성을 한평 반짜리 폐쇄적인 공간에 가둔다” 등의 내용이 담기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랄랄라~”

왜색문화라는 비판도 심지어 초기 잦은 마이크 감전사고도 시대적 흐름을 막지 못했다. 1993년 청소년 출입제한까지 풀리면서, 노래방은 오히려 전 국민의 놀이터가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미 단음 반주는 사라지고 다중 음의 고음질 설비가 노래방을 채웠다. 템포조정, 육성 코러스 등의 기능도 도입됐다. 1996년 이미 전국 노래방 업소는 3만 5000개를 넘어섰으며, 코인제 대신 관리가 편한 시간제 시스템이 일반화됐다. 1990년대 후반에는 카페형 럭셔리 노래방이 등장했는데, 화사한 분위기와 신발 벗고 입장한다는 독특한 룰이 특징이었다.

이 시절엔 여럿이 밤늦게까지 모였다 하면 누군가 “2차(혹은 3차)는 노래방”을 외쳤다. 노래방이 일상이 되다 보니, 누구나 자신만의 십팔번을 만들었고, 확실히 예전보다 음치·박치도 귀해졌다. ‘노래방에서 떠야 노래가 뜬다’며 가수들도 따라부르기 좋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전 국민의 가수화는 훗날 ‘슈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를 탄생시켰고, K-POP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과언이 아니다.

노래방 유행은 부산 기업에도 과실이 돌아갔다. 금영은 원래 1980년대 문방구용 오락기 제조업체였다. 노래방 반주기계 사업에 뛰어든 뒤 연매출 700억 원대의 꽤 큰 기업이 되기도 했다.

2008년 언론 인터뷰에서 음악평론가 송기철은 “가라오케가 단순한 반주 기능에 그쳤다면 한국의 노래연습장은 스스로 무대를 연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진화했다”며 “값싸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로 굳어졌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이 노래방의 절정이었다. 지금은 정체 또는 하락세다. 2005년 3만 7568개였던 전국의 노래방은, 매년 감소해 지금은 3만 1110개(부산 1844개) 정도이다.

감소폭이 점점 커지고 있다. 1위 노래반주기 제조업체인 TJ미디어도 지난해 매출 감소로 17억 원 이상의 손실을 냈다. 노래방의 공급과잉에다 일명 ‘김영란법’ 시행과 ‘워라밸’ 문화로 놀이문화가 변화한 결과다.

물론 노래방이 사라지기야 하겠는가. 술이 안 들어가도 기분전환을 위해 몇 곡 부르는 놀이문화가 퍼지면서 코인노래방이 다시 뜨고 있다. 나홀로 코인노래방을 찾는 일명 ‘혼코노’도 늘고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전국민적 놀이문화 발생지의 역사적 가치는 커질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누군가 지금은 사라진 로얄전자오락실과 하와이비치 노래연습장의 흔적을 찾아내, 표지석이라도 세워주면 좋겠다. 이곳에서 노래방이 탄생해 자고 있던 한국인의 흥을 깨웠다고.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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