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논의 재발견
삶의 공간이 아니라 풍경의 대상으로 보면 논은 그저 쌀을 생산하는 경작지일 뿐이다. 공간의 효율성만 따지는 자본의 논리라면 논밭을 갈아엎어 건물을 세우는 게 남는 장사다. 가뜩이나 쌀 소비량이 줄면서 논을 대하는 시선도 예전 같지 않다. 곡창지대는 개발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논 한가운데 ‘갑툭튀’처럼 아파트가 한두 채 들어서더니, 야금야금 옥토를 잠식해 신도시가 됐다. 학교 다닐 때 배운 사회 교과서 속의 김해평야는 없다.
공장과 대규모 택지 개발로 사라진 논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1988년 135만 7857㏊에 달하던 전국의 논 면적은 2018년 84만 4265㏊로 쪼그라들었다. 건조한 통계 수치로는 가늠하기 어렵다고? 30년 만에 부산시 면적의 6.7배에 맞먹는 논이 사라진 거다. 논 실종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2017년 전국의 논 면적이 86만 4865㏊였으니, 1년 새 해운대구 면적의 4배나 논바닥이 시멘트로 바뀌었다.
개발에 눈먼 탓도 있지만, 논이 생물다양성을 실현하는 훌륭한 생태계임을 망각한 탓도 크다. 논은 생각보다 일을 많이 한다. 논은 일시적으로 빗물을 가둬 홍수를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논이 저장하는 물이 증발하면서 한여름 대기의 온도를 낮춰주고, 논에서 자라는 벼는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대기 질을 맑게 한다. 수질 정화도 논의 역할 중 하나다. 결정적으로 논은 철새부터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체가 살아가는 터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 위에 건설돼 있음을 깨우쳐주고, 지구 생태계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겸손함을 가르쳐주는 공간이다. 논의 힘은 그만큼 세다.
논이 생긴다는 소식이 들린다. 부산시가 강서구 맥도생태공원 내 14.87㏊의 논을 조성할 거란다. 생태공원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유채꽃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찍는 눈요깃감으로 전락한 터라 이곳에 논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환영할 일이다. 양미역취, 단풍잎돼지풀 따위의 생태교란식물 번식 경로를 차단하고, 떠났던 철새도 다시 불러들이겠단다. 철새에게 먹이를 양보하려고 수확은 최소화하겠단다. 쌀 생산이 주목적이 아니라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논 습지의 역할을 재발견한 거다. 다만 진작부터 논 습지 조성을 주장해온 환경단체를 배제한 채 행정기관이 일방적으로 관리·운영을 자임한 건 성급해 보인다.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것만큼이나 사회다양성을 실험하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기에 하는 말이다. 이상헌 논설위원 ttong@busan.com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