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터치] 눈먼 자들의 대학
/김태만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어느 날 아침, 차를 몰고 출근하던 회사원이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 차를 멈춰 세웠다. 뒤따르던 차가 경음기를 울리고, 차들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차에서 내린 사람이 “눈이 안 보인다!”라고 외친다. 그 옆에 있던 사람도 같은 증상으로 눈이 멀고, 마침내 도시 전체에 ‘실명’의 ‘전염병’이 퍼진다.
학령인구 격감·산업구조 변화·학력저하…
이미 닥친 위기에도 무감한 지방대학
대학의 생존 위해선 정체성 수립이 우선
실질적인 대학 자치·국립대 혁신도 절실
1998년 노벨상을 받은 포르투갈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도입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금세 오물과 약탈의 도시로 변하고 만다. 치안을 위해 눈먼 자들을 가두지만 전염병은 계속되고 관리도 불가능해 풀어 준다. 눈먼 자들에게 “너는 자유다. 가라”라고 말해도 겁에 질려 떠나지 않고 머뭇거린다. 눈이 멀고 난 후 의존할 수 있는 것은 눈이 멀기 전에 보았던 기억들뿐,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나 시도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떠날 수도 없다. 세기말적 인류에 대한 지독한 은유이지만, 우리 직장, 사회, 도시, 국가의 구성원도 눈이 멀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내가 속한 직장인 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격동하는 세상에 뒷짐 진 채, 혁신은커녕 깊은 침잠에 빠져 눈을 감은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첫째,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인구 절벽에 대한 우려는 당면한 문제다. 출산율을 제고할 방법이 없다면 저출산 과소인구 사회를 더 적절히 준비해야 한다. 통계청 ‘한국의 사회 동향’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57만 명이던 고교 3학년생이 올해 6만 명이 줄어 대입 정원인 49만 명을 위협한다. 내년이면 6만 명이 더 줄어 전국적으로 입학 정원 미달사태가 도미노처럼 진행될 수 있다. 국·사립을 떠나 대학의 정원 감축은 더 미룰 수 없는 현실이다.
둘째, 산업구조의 변화다.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됐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는 준비 순위가 스위스 1위, 싱가포르 2위, 일본 12위, 대만 16위, 중국이 28위인데, 대한민국은 25위에 머물고 있다. 10여 년 전 ACE 사업(대학자율역량강화지원사업) 등으로부터 학과나 교과과정 개편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지만, 지역 대학들은 근본적 혁신보다 임기응변식 대응에 급급했다. 혁신역량강화대학 지정이나 혁신지원사업 선정 등으로 되풀이되는 지역 대학의 부침이 철저히 교육부의 재정 지원에 기대고 있는 지방대학 재정구조 탓이란 걸 알면 더 기막힐 노릇이다. 기존의 대학 구조나 교과 형태를 과감히 탈피해 4차 산업혁명에 걸맞게 체제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셋째, 공공연한 비밀인 지방대의 학력 저하도 심각한 문제다. 강의실이 더는 치열한 토론이나 예리한 질문들로 긴장된 공간이 아닌지 오래다. 대학에서 학원과의 차별성을 찾기가 어렵다. 우수한 자원을 서울/경기에 뺏기는 처지에서 어쩔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종합화가 능사도 아니다. 특화된 교육이나 커리큘럼을 최대한 구사하고, 학생 수요에 1대1 대응이 가능한 교육시스템을 부단히 개발해 우수 학생을 유치해야 한다.
넷째, 유독 부산에만 국립대학이 네 곳이나 존치하는 현실도 더는 두고 볼 일이 아니다. 참여정부 때부터 논의해 왔던 역내 국립대학 연·통합은 학령인구 격감이나 산업구조 전환에 따라 현실화가 머지않았다. 역내 대학들이 R&D 예산을 놓고 벌이는 과당 경쟁이나 대학별 중복투자 등은 국가적 차원에서도 혁신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무엇보다 절실한 건 자유와 진리 탐구를 바탕으로 하는 대학의 정체성 수립이다. 다음 달이면 부산대 고(故) 고현철 교수의 4주기가 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진행했던 ‘국립대학 선진화 방안’으로 총장직선제 폐지를 강요하는 악법에 저항해 투신했던 숭고한 뜻을 한시도 잊을 수 없다.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대학의 자치와 자율을 억압하려는 교육부에 의해 민주주의가 더는 훼손돼선 안 된다. 민주와 자유야말로 대학의 꽃이고, 상수이기 때문이다.
대학은 도시의 미래다. 우수한 학생이 몰려오고, 독창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교육시스템이 작동하고, 지역사회와 굳건한 연계 속에 관산연학을 주도적으로 수행해 갈 때 ‘눈 뜬 자들의 대학’은 만들어질 것이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