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 세상 읽기] 29. 한민족의 바이블: 춘향전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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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이라 쓰고 ‘자유연애’로 읽어볼까

춘향의 수직적 신분 상승은 입신양명이란 당대 지배층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부합한다. 사진은 국립부산국악원 단원들의 춘향전 사랑가춤 공연 장면. 부산일보DB 춘향의 수직적 신분 상승은 입신양명이란 당대 지배층의 성리학적 세계관과 부합한다. 사진은 국립부산국악원 단원들의 춘향전 사랑가춤 공연 장면. 부산일보DB

‘성 접대는 조선의 오래된 문화’라는 망언이 바다 저편에서 다시 들려온다. 굴지의 연예기획사나 아이돌 가수가 해외 투자자에게 성적 향응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다. 특히 매춘부를 현대판 기생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심각한 혐한 발언이며 역사 왜곡이다. 한양에 살던 기생, 즉 경기(京妓)들의 주된 역할은 궁중 잔치에 가무를 제공하는 것이다. 잠자리 시중을 들었던 지방 관기들에게도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수청은 강요할 수 없었다. 〈춘향전〉에서 남원부사 변학도가 파면된 것도 원칙을 무시하고 멋대로 여색을 취하려 한 탓이다. 아무리 반상(班常)의 구분이 뚜렷한 왕정 사회에서도 금지선을 넘어오는 순간, 저항과 투쟁이 시작된다. 춘향은 투옥되고 고문을 당해도 ‘일편단심’이라 쓰고 ‘자유연애’로 읽는 근대적 가치를 지켜내면서 기생에서 정렬부인으로 수직적 신분 상승을 쟁취했다. 갖은 고난 끝에 맞이한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성공담이니 당대 지배층의 성리학적 세계관과도 부합한다.

18세기 중엽 등장… 민족 정체성 담겨

각종 영화·드라마 ‘범민족적 사랑’ 받아

‘정절’ 가치관 뒷면의 신분차별 비판

수청 거부는 신체의 자유 향한 출발점

대담한 성애 묘사로 남존여비 뒤엎어

그래서 18세기 중엽 등장한 이래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범민족적 사랑을 받아왔다. 다양한 판본이 나오고 각각의 해석이 따르고 시와 소설,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과 오페라로 뻗어 나가는 거대한 뿌리가 된 것이다. 이어령을 필두로 한 문화평론가들 대부분이 〈춘향전〉을 한국학의 바이블로 인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호명되는 ‘클래식’이자 한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문화 유전자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일부종사’로 씌워진 당의(糖衣) 안에는 신분제의 모순과 이념 투쟁의 쓴 약이 들어있다. 여성을 가두는 정조 이데올로기와 세습되는 신분의 문제점에 시종 비판적이다.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넘어왔지만 여전히 계급 장벽이 존재한다는 지금에도 〈춘향전〉이 호소력을 가지는 까닭이다. 특히 성을 매개로 한 ‘특권층’의 잇따른 추문과 범죄는 고전소설의 풍부한 현재성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씁쓰레하다.

욕정으로 시작된 사랑

고전문학 연구자인 이정원 박사는 권세가 자제 이몽룡의 추잡한 배설욕에서 춘향전이 시작됐다고 본다. 그네를 뛰는 춘향의 모습에 반해 하인에게 데려오라고 지시를 내리는데 사랑보다는 욕정이 출발점이다. 사또 아들에게 퇴기의 딸은 성적 노리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 충동을 예술로 승화시키듯이 춘향은 본능의 조련사다. 영원히 함께하자던 이 도령이 떠나고 변 사또의 호출로 신분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그녀에게 과거는 욕동의 모래성이 아니라 사랑의 철옹성으로 구축된다. 대다수 사람에게 열녀가 되겠다는 춘향의 고결한 결의는 비웃음의 대상이다. 언감생심의 헛된 꿈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맨몸뚱이 하나가 무에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다.

한데 근대 사회는 신체의 자유가 출발점이다.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개인의 탄생과 인간 해방의 첫걸음 아닌가. 〈춘향전의 인문학〉을 쓴 김현주 교수는 수청을 거부한 결단이야말로 신분 질서에 대한 항거이자 에로스를 멸시하는 통념에 도전한 혁명이라고 규정한다. 임란과 호란을 겪고 위기 관리능력에 바닥을 보인 집권층의 돌파구는 신분제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 공세였다. 그러나 계급 차별이 야기하는 모순이 누적될수록 신분의 유동성에 대한 요구는 거세졌으니, 춘향의 몸을 둘러싼 투쟁은 권력과 민중의 역학 관계일 수밖에 없다. 도학군자를 내세운 사대부의 위선은 춘향과 몽룡의 첫날밤에서 완벽하게 뒤엎어진다.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 君子好逑)의 유교적 이상은 적나라하고 대담한 정사 장면의 묘사로 무력화됐다. 에로 문학을 표방했다기보다 ‘사농공상’과 ‘남존여비’에 짓눌린 인간의 본성을 재발견하면서 표현의 강도가 세진 것이다.

사회적 약자의 인간 선언

작품에서 제시되는 춘향의 족보도 파격적이다. 아버지 성 참판이 아니라 퇴기인 어머니 월매에게 방점이 찍혀 있다. 부계(父系) 가문주의에 대한 저항이자 양반 패권주의를 전복하는 반봉건적 의지의 발로다. 예수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시아버지와 동침한 다말, 기생 출신의 라합 등을 선조로 거론한 마태복음의 파천황적 구성과 흡사하다. 가장 천하고 소외된 여인에게서 민족과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나온 것처럼 기생의 딸이라고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춘향의 파격적 신분 상승을 설명하기 위해 성 참판을 끌어들였지만, 오히려 부모 관계의 역전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의 인간 선언을 끌어낸 것이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춘향전〉의 세목들은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고 저항하기 위한 절충책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한국인의 근대적 정체성을 형성해낸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위대한 문학은 늘 작자의 의도를 넘어 커다란 결실을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의 고전에서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유쾌하다.


정승민


교양 팟캐스트 ‘일당백’ 운영자

※이번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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