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 장군 각암비’ 시민 성금으로 다시 세웠다
김영 각암비 복원사업 추진위원회는 5일 정량동 덤바우길 일원에서 각암비 복원기념 제막식을 가졌다. 현장에는 강석주 통영시장을 비롯해 통영시의회 김미옥 기획총무위원장과 김용안 산업건설위원장, 김영 통제사 후손인 해풍김씨대종회, 주민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통영시 제공
속보=“190년 전 각암비를 남긴 민초들의 뜻이 100년, 200년 계속 이어질 바랍니다.”
한겨울 덮친 화마에 집을 잃고 추위에 떠는 백성을 보다 못해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소나무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파직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사 김영(1772-1850) 장군을 기리는 각암비(<부산일보> 9월 24일 자 14면 보도)가 시민의 손으로 다시 새겨졌다.
법으로 금지된 소나무 벌목
화재 피해 백성 집 짓게 허용
숱한 목숨 살려내고 파직 당해
1970년대 사라진 공덕비 재건
김영 각암비 복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백현백)는 지난 5일 정량동 덤바우길 일원에서 ‘제166대 통제사 김영 각암비 복원기념 제막식’을 가졌다. 현장에는 강석주 통영시장을 비롯해 통영시의회 김미옥 기획총무위원장과 김용안 산업건설위원장, 김영 통제사 후손인 해풍김씨대종회(대종회장 김진우), 주민 등 100여 명이 함께했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1829년(순조 29년) 겨울, 덤바우골(지금 동피랑 언덕)에 큰 불이 나 민가 수백 호가 잿더미로 변했다. 이에 김영 통제사는 인근 남망산 소나무를 베 새집을 짓는 데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백성을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 일로 관직을 잃었다. ‘금송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국법은 궁궐 건축이나 군사적 목적에만 소나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김영 통제사는 이듬해인 1830년 파직됐다.
그러자 백성들이 김영 통제사가 베푼 은덕을 잊지 않겠다면 화재 당시 장군이 진화작업을 지휘한 덤바우(바위)에 그 내력을 새겼다. 바로 ‘통제사 김영 각암비(統制使 金煐 刻巖碑)’이다.
김영 각암비 복원 추진위원회(위원장 백현백)는 지난 5일 정량동 덤바우길 일원에서 제166대 통제사 김영 각암비 복원기념 제막식을 가졌다. 해풍김씨대종회 김진우 회장(왼쪽)이 비문에 새긴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통영시 제공
그런데 1970년대 동문고개 도로 개설 공사에 각암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1934년 발간된 통영군지에 전문이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그동안 향토사학계에선 초대 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 만큼이나 백성을 아낀 김영 장군의 역사로 이대로 흘려보내선 안 된다는 주장이 계속됐고 결국 시민들이 나섰다.
해풍김씨대종회가 통영시에 각암비 복원 요청 건의문을 제출한 것을 계기로 당시 각암비를 새긴 민초들의 뜻을 이어 시민의 힘으로 재건하기로 한 것이다. 8월 류성한 정량동장 주도로 복원추진위를 구성한 주민들은 자발적 모금을 통해 사업비 2000만 원을 마련했다. 이를 토대로 본비와 해설비 등 2기를 만들었다.
시민 모금 운동으로 재건된 통제사 김영 장국 각암비. 왼쪽 본비는 고흥석을 가로 1.8m, 세로 1.6m 크기 상석으로 가공해 원문을 새겼다. 해설비는 가로 1.5m. 세로 1.2m 직사각형의 검정색 오석으로 제작했다. 전면에 비문 해설, 후면에 재건 내역을 담았다. 복원추진위 제공
본비는 고흥석을 가로 1.8m, 세로 1.6m 크기 상석으로 가공해 원문을 새겼다. 해설비는 가로 1.5m. 세로 1.2m 직사각형의 검정색 오석으로 제작했다. 전면에 비문 해설, 후면에 재건 내역을 담았다. 2개의 비는 덤바우가 있던 곳에서 50m 남짓 떨어진 작은 언덕에 자리 잡았다.
김진우 해풍김씨대종회장은 “우리 선조가 남긴 역사를 잊지 않은 주민들에게 거듭 고마움을 전한다”며 감격해 했다. 강석주 통영시장은 “당시 각암비를 새긴 민초들의 뜻이 다시 이어져,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통영의 근간이 된 통제영의 역사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민진 기자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