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사실과 진실, 뭣이 중헌디?
/이상기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사실과 진실 중 무엇이 중요할까? 저널리즘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가 낭패를 당했다. ‘진실이 중요하다’는 답이 많으리라 지레짐작했는데 ‘사실이 중요하다’는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자들도 진실보다 사실에 천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강하게 든다. 뉴스는 시간과의 싸움이기에 일견 수긍이 가는 측면도 있다. 사실 확인은 현실이고, 진실 추구는 이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 2년 걸려
진실 밝히는 일 지난한 노력 필요
보도자료 의존 ‘사실 보도’ 관행
현장 탐구 ‘진실 보도’로 바뀌어야
야구처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기가 늘어지면 스포츠 기자는 죽을 맛이다. 마감 시간이 닥쳐오도록 승부가 나지 않아 ‘앙코 없는 찐빵’ 같은 기사를 송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가 승부 조작에 연루되었다면 어떨까? 승패의 결과라는 단순한 사실은 결코 중요한 뉴스가 되지 못한다. 지금 미국은 2017년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포수의 사인을 훔쳤다는 논란에 휩싸여 떠들썩한 상황이다. 우승이 박탈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문제는 진실이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은 데 있다. ‘세계의 권력자’인 현직 미국 대통령을 주저앉힌 워터게이트 사건도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2년이나 걸렸다. 대부분의 언론인은 사과 성명과 함께 닉슨이 사건에 연루된 보좌관들, 법률 고문, 사법 장관 등을 차례로 해임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된 것(참모들의 과잉 충성)으로 여겼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의 신참 기자였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달랐다. ‘닉슨에게는 과연 책임이 없었을까?’ 하는 도발적인 의문을 품었다. 두 사람은 밥벌이를 위해 워터게이트와 전혀 무관한 많은 기사를 작성하는 틈틈이 이 의문을 파고들었다. 이들의 노력이 얼마나 갸륵해 보였던지 결국 결정적인 제보자(deep throat)의 마음마저 움직였다. 이 제보자로부터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 전모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은폐하는 데에도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백악관 대책 회의 녹음 파일)를 얻었다. 이후의 결과는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이를 계기로 언론은 행정부·입법부·사법부와 더불어 ‘제4부’라는 영예도 얻었다. 비록 저널리즘을 전공하지 않은 기자들일지라도 이 유명한 사건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인들은 여전히 진실의 실체를 규명하기보다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끼워 맞추는 지엽적인 역할에 자족하는 듯싶다. 부분적인 사실들이 모여서 궁극적으로 진실이라는 큰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와 같이 각 부분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모였던 과학자들이 전체 계획(원자폭탄)을 미리 알고서도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을까? 검찰은 ‘범죄를 구성’하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용의자의 혐의를 하나씩 끼워 맞추는 데 능수능란하다. 검찰이 주도하는 사건에서 기자들이 부분적 사실을 밝혔다고 마냥 흡족할 일은 아닌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기억하는 대중에게 최근의 조국 관련 보도가 먹히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다.
최근 저널리즘 세미나에서 억울하다는 기자들의 하소연을 접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현재의 검찰과 똑같이 일했는데, 과거에는 박수를 치다가 지금은 돌을 던지는 대중이 야속하다는 말도 들었다. “얘가 왜 안 좋아하지? 작년 설에는 무지 좋아하더니만!” 무럭무럭 자라는 손자에게 1년 전과 똑같은 선물을 준 할아버지가 의아해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겹쳐 보였다.
KBS ‘저널리즘 토크쇼 J’는 “언론의 관행은 여러분이 바꿀 수 있습니다”라는 멘트로 끝맺는다. 이 방송사는 스스로 언론의 관행을 바꿔보겠노라고 선언했다. 취재 보도 인력의 일부만 주요 출입처를 담당하고, 대부분의 기자는 손수 기사를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YTN도 동참을 약속했다. 익혀진 보도자료를 거저먹는 ‘사실 보도’ 관행이 밭에서 열매를 직접 따야 하는 ‘진실 보도’ 관행으로 쉽게 바뀌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좀 여유롭고 관대하게 방송 뉴스의 변화를 지켜볼 참이다. 첫술부터 배부르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