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무심한 이웃과 진정한 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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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의 마지막 주, 부산에서는 한·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정상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정부와 달리 일반인들은 이 회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한국인들에게 아세안은 가끔 방문하는 해외 관광지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의 언어는 우리와 다르고, 그들의 역사는 거의 연관이 없다. 종교, 피부색, 경제력, 도시적 취향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익숙한 서구 열강으로 친숙한 존재도 아니며, 국경을 맞댄 부담스러운 이웃도 아니었다. 적절하게 멀리 있고, 가끔 찾아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권과 관심사가 딱히 일치하지도 않은, 그야말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무심한 이웃’이라 하겠다.

이와 달리 동남아시아인들에게 한국은 조금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존재로 바뀌고 있다. 한국 내 동남아시아인들의 비중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학교에는 한국어를 배우려는 유학생이 폭증하고 있고, 이전부터 공장에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노동자들이 들어서 있었다. 국제결혼 명목으로 농촌 총각에게 시집온 여성들도 이제는 무시 못 할 수에 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상식 이하일 정도로 우월감에 가득 차 있다.

한국 내 동남아시아인 비중 증가

유학생 폭증하고 이주노동자도 많아

남편 폭력에 시달리는 이주여성 포착

외면하고 싶은 부끄러운 자화상

식민통치 당한 처지에서 횡포 가해

아세안에 대한 존중과 진심 보여야

‘의형제’는 홀로 남은 남파간첩과 작전 실패로 물러난 국정원 직원이 힘을 합쳐, 도망친 외국인 신부 혹은 이주민을 잡아들이는 흥신소 업무를 그린 영화다. 이 과정에서 이 땅에서 함께 살지만, ‘돈으로 사들인 신부’ 혹은 ‘매 맞는 아내’ 내지는 ‘재산이나 다름없는 며느리’로 취급되는 이주 여성의 모습이 포착된다. 실로 외면하고 싶은 한국의 현실이고,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식민통치를 당하며 약소국의 설움을 겪은 자의 처지에서 이러한 횡포가 탄생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힘이 없어 국가를 빼앗기고 우월한 자를 표방하는 침략자의 손길에 고통을 겪은 기억을 분명히 잊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부에 식민지 아닌 식민지를 건설하여, 그들을 부리고 착취하고 함부로 다루는 일을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실질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성취의 우월감에 도취하여 자신의 권리 행사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풍조를 용인해 왔다는 점에서 함부로 면책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과거를 잊었고, 침략자의 논리를 답습한 셈이다. 더구나 백색 피부와 파란 눈 그리고 영어의 위력 앞에 다시 위축된다는 점에서, 심지어 두 얼굴마저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우리가 한-아세안 회의에서 진정한 우의를 논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은 폭력적 지배와 역사적 부당함으로서의 성노예 문제에 대해 일본에게 항의하고, 그들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소리를 높여오고 있다. 이것은 강압적인 폭력의 역사를 지적하고 역사의 올바른 길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참전하여, 그 땅에 숱한 ‘라이따이한’을 남겨두고 온 처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와 아세안 사이에 무작정 진솔한 교류가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강대국 중국과 무책임한 일본 사이에서 전략적 제휴를 꿈꾸는 우리 정부의 노력이 가상해 보이면서도, 정작 그 밑에 가라앉아 있는 중요한 덕목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하는 우리의 모습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담의 성사이고, 효율적 진행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면에서 상대에 대한 진심을 우리 내면에서 먼저 확인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아세안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그 어떤 환영도, 제의도, 제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김남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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