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산책] 솔라 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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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차섭 부산대 사학과 교수

타락한 영혼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가 유일 종교였던 중세 유럽 사람들의 절대 명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유독 구원이라는 이데아적 관념에 집착한 교리가 워낙 오랫동안 지배하다 보니 중세인들은 죽음에 가까울수록 자신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거의 편집증적 반응을 보였다.

루터의 ‘믿음만이 구원의 길’ 선언에도

재물만 추구하는 듯한 현실 안타까워

종교가 최상의 도덕인 모습 언제일지

특히 상인 계층은 이 문제에 훨씬 더 민감했다. 그들은 종종 교회에 재산의 상당량을 기부했고, 때로는 자신들이 의뢰한 성화(聖畵)의 한 귀퉁이에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조그맣게 그려 넣음으로써 이미지로나마 천국에 가까워지고자 했다. 이윤에 의한 축재를 악으로 보는 교리 때문에 지옥으로 직행할 운명에 처해 있었던 중세 상인들(하물며 고리대금업자는 말할 나위도 없다)은, 12세기 들어서야 다행히 연옥(푸르가토리오)이라는, 지옥도 천국도 아닌 영혼의 새로운 주거 영역이 발명됨으로써 한숨 돌리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의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오르고 있던 16세기 초, 유럽 변방인 독일 작센 지방에는 구원이라는 신학적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던 한 무명의 학인(學人)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원래 광산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법률가의 길을 택했으나, 청년 시절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구원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결국 수도사의 길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는 심리학적으로 볼 때,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학적 보편 명제를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문제로 각별히 내면화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구원 가능성에 깊은 회의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는 어느 날 평소 읽던 성경 한 구절에서 문득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발견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다시 3장 24절의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풍스러운 번역 때문에 독해가 약간 난해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루터가 깨달은 메시지는 요약하자면 결국 예수를 통해 신이 자유로이 내린 믿음만이 구원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는 겉보기에 단순한 것 같지만, 종래 가톨릭이 강조해 온 선행과 순례와 성사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매우 급진적인 신학 교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의인론(혹은 칭의론)의 요체인 ‘솔라 피데(오직 믿음만으로)’다.

하지만 루터의 ‘새로운’ 해답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솔라 피데’는 그보다 몇 세대 앞서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그 뒤를 이은 보헤미아의 얀 후스의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만으로)’에서 이미 현시된 것이었다. 역사가 흔히 증거하듯이, 루터의 성공은 교의의 새로움 이상으로 그것이 제시된 절묘한 타이밍에 있었다. 그에게는 선구자들과는 달리 자신을 보호할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동시에 그의 교리를 확산시킬 장 칼뱅이라는 시의적절한 계승자도 있었다. 제후의 후원을 받은 루터와는 달리, 칼뱅은 상인 공화국 제네바를 거점으로 새로운 교의를 부르주아 계급에게 널리 퍼뜨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루터의 교의에 잠재되어 있던 이른바 예정론(신은 구원받을 사람을 이미 정해놓았다는 것)을 사업의 성공과 연결함으로써 장차 그리스도교와 자본주의가 조화롭게 결합할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이자를 정당화한 것도 칼뱅이었다.

‘솔라 피데’는 부패로 얼룩진 중세 가톨릭의 교의를 보다 순수한 신앙의 원리로 되돌리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지만, ‘오직 믿음만’에 기대어 그 순수성을 되찾기에는 인간 심성이 너무나 영악한 탓일까. 우리 눈에 보이는 작금의 현실은 오직 믿음은커녕 ‘오직 재물만으로’ 교의가 바뀐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루터는 사라지고 칼뱅은 천민자본주의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또 한 해가 가고 어김없이 예수의 탄생일이 돌아오지만, 종교가 곧 최상의 도덕인 모습은 언제나 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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