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한 해의 끝과 새로운 시작
김남석 문학평론가
어느덧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고 있다. 1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마음도 특별해지기 시작이다. 때마침 해는 짧아지고 밤은 길어져서 인간들은 사색의 시간을 더욱 많이 갖는데, 사색의 주요 대상 중 하나는 일 년 동안의 삶과 그 삶 속의 자신이다. 깊어가는 겨울밤과 함께, 인간들은 자신의 내면에 깃들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부여받는 셈이다.
인간은 ‘속의 시간’만으로 살 수 없어
삶의 주기 멈추고 특별한 시간 필요
‘속의 시간’에 ‘성의 시간’ 끼어들어야
1월 1일 일출 보러 가는 행위
새로운 목표 설정과 출발의 시간
삶의 방향을 수정하고 가다듬는 기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12월이라는 달과 1년의 끝이라는 시점은 임의로 정해진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믿는 1월 1일은 필연적으로 새해의 첫날이 되어야 할 근거를 처음부터 확보한 시간이 아니었다. 일 년 후에 정해진 그날이 찾아오면, 또 다른 새해가 시작된다는 누대의 믿음이 쌓여 임의로 정해진 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날의 밤이 가장 긴 것도 아니고, 그날의 아침이 그 전날의 아침과 특별히 다른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새해 첫날은 특별한 표식을 갖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특별한 날을 1월 1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1월 1일로 결정해서 특별한 시간을 갖게 된 셈이다.
서구의 한 저명한 신화학자는 우리가 이러한 날을 정하는 이유를 ‘성(聖)’의 시간을 체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노동과 규율의 시간을 우선 살아가야 한다. 현대의 라이프스타일로 환원하면, 대개 아침 9시까지 출근하고 점심은 12시에 먹고 저녁의 정해진 시간에 퇴근한다. 일주일의 5일은 일해야 하고, 한 달의 어느 시점에서 노동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원시인들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해진 일과를 습득하고 반복하는 훈련을 해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삶의 주기는 역사적이기까지 하다. 인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틀림없이 미래에도 동일한 규칙과 주기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 시간이 통칭 ‘속(俗)’의 시간으로 명명된 것이다.
문제는 인간은 ‘속의 시간’만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이다. 일주일의 어느 순간에는 쉬어야 하고, 일 년의 어느 시즌에서는 규율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군가가 태어난 날이나 죽은 날을 기억하는 행사를 치러야 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나 팥죽을 먹어야 하는 날을 갖기를 원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결혼기념일이 중요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15년을 함께 산 반려동물을 세상 밖으로 떠나보낸 날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시간들은 속의 시간 속에 틈입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반복하고 있던 삶의 주기를 멈추고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도록 허락한다. 이른바 속의 시간 속에 성의 시간이 끼어드는 셈이다.
1월 1일이 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하여 어디론가 찾아든다. 평소에 가지 않던 곳에 가서, 설령 작심삼일로 끝날지언정 새로운 목표를 되뇌고, 특별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시간은 성의 시간이고, 일상의 시간과 규칙의 시간에서 잠시 벗어나는 예외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모습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모습을 평소와는 다른 시간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019년의 한국인은 2020년 이 첫 특별한 시간에 과연 어떠한 생각을 할까. 어떤 사람들은 가족을, 다른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일본과의 집요했던 갈등이나 롤러코스터처럼 변전하는 북한과의 관계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특권층과 그의 자녀가 일으킨 경종을 기억할 수도 있고, ‘기생충’이라는 특별한 영화가 가져온 씁쓸한 우리의 모습을 복원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것이든, 성의 시간은, 속의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수정할 시간이 있고 가다듬을 기회가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을 그토록 억지로라도 보유하려 해왔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에게도 그 시간이 다시, 의미 있게 다가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