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부모를 죽인 운명의 대가로 탄생한 ‘대영제국’
1. 영국 런던 : 트로이의 브루투스
영국 런던 한가운데로 템스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의 브루투스’는 트로이 유민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해 브리티시, 즉 영국을 세웠다.
유럽은 세계 최고의 인기 여행 지역이다. 지난해 7억 1000만 명이 방문했다. 이곳엔 아름답고 재미있는 역사와 문화, 예술이 늘 함께 숨 쉰다. 이게 이곳의 매력이다. ‘유럽 인문학 기행’을 시작한다. 읽기 쉬운 옛날이야기 형식인 스토리텔링으로 유럽 여러 나라의 여행지 등을 둘러보는 글이다. 유럽의 속살을 들여다보면서 대륙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모이라이 여신의 ‘운명의 실’에 얽힌
트로이 출신 ‘알바롱가’ 왕자 브루투스
출생 때 어머니 잃고 실수로 아버지 죽여
반역자로 낙인찍혀 이곳저곳 떠돌다
꿈 속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예언 좇아
프랑스 거쳐 지금의 런던서 나라 세워
영국명 ‘브리티시’ 등 곳곳에 흔적 남아
역사서 <트로이의 브루투스> 표지.
■알바롱가 왕 부자의 비극
먼 옛날 이탈리아반도에 알바롱가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리스의 트로이가 멸망한 뒤였고, 이탈리아에는 로마가 탄생하기 이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이었다.
알바롱가를 세운 사람은 아스카니우스였다. 트로이 전쟁에서 나라의 멸망을 피해 달아난 아이네이아스의 아들(또는 손자라고 한다)이었다.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는 아스카니우스의 후손이었으니 알바롱가는 로마의 조상 나라였던 셈이다.
아스카니우스는 나라를 세운 뒤 후사를 얻기 위해 결혼했다. 그의 기대대로 왕비는 곧바로 임신했다. 왕은 점쟁이를 불렀다. 태어날 아기의 운명은 어떤지, 알바롱가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다. 한데 점쟁이는 충격적인 점괘를 내놓는다.
“왕이시여! 왕비께서는 아들을 순산하실 것이외다. 왕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용감하고 모험적인 청년으로 자라날 것이오. 그런데 송구한 말씀이오만, 왕께서는 아들 때문에 왕비와 당신의 목숨을 잃고 왕 자리마저 빼앗길 운명이시오. 그렇다고 해서 왕의 아들이 권좌에 오르는 것은 아니외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 머나먼 타지에 자리를 잡게 되는군요. 그것이 알바롱가의 운명이고, 당신 부자의 팔자요.”
아스카니우스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가 나중에는 화가 났고, 마지막에는 아주 냉정해졌다. 왕은 병사를 시켜 점쟁이의 목을 잘라버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점괘를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게 왕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한다고 해서 점쟁이의 점괘는 틀릴 수가 없었다. 아스카니우스의 비극은 점쟁이가 결정한 게 아니라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 세 자매가 ‘운명의 실’을 뽑을 때 이미 정해놓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점쟁이는 다만 그 운명의 실을 읽었을 뿐이었다.
여러 달 뒤 왕비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출산 후유증으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점쟁이의 첫 예언이 적중한 셈이다. 아스카니우스는 아들에게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점쟁이의 점괘는 엉터리야. 왕비가 죽은 것은 우연의 일치야. 아이 낳다 죽는 여인이 어디 한둘인가! 혹시 그놈 말이 맞더라도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의 손에 죽는 것은 그다지 원망스럽지 않아.’
다시 세월이 흘렀다. 점쟁이의 두 번째 예언이 적중할 날이 다가왔다. 아스카니우스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사냥 다니기를 좋아했다. 왕비도 없는 궁전에서 궁상을 떠는 것보다는 너른 들판을 달리며 맹수를 잡는 게 좋았던 것이었다. 브루투스가 청년으로 성장한 어느 해 봄날에도 두 사람은 평소처럼 사냥하러 길을 나섰다. 부자는 숲 입구에서 사슴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흩어져 사슴을 양쪽에서 쫓기로 했다.
“아들아, 나는 오른쪽으로 가서 사슴을 몰도록 하마. 너는 왼쪽에 숨어 있다가 활을 당겨라.”
브루투스는 아버지 말대로 왼쪽으로 돌아가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눈앞에 사슴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조심스레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으악!”
갑자기 사람의 비명이 들렸다. 그가 쏜 화살은 사슴이 아니라 사람을 맞힌 것이었다. 브루투스는 깜짝 놀라 달려갔다. 화살에 맞은 사람은 아버지 아스카니우스였다. 점쟁이의 예언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한 나라의 왕을 시해한 반역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어찌 아버지가 세운 나라에 살 수 있으리!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으리라!”
브루투스는 아버지 장례식을 마친 뒤 알바롱가를 떠나기로 했다. 신하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알바롱가의 법률에도 아버지를 살해한 자는 사형 또는 추방하게 돼 있었다. 브루투스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트로이로 가기로 했다. 거기서 신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브루투스가 묻혔다는 타워 힐에 있는 옛 런던항만위원회 건물.
■아르테미스 여신의 호의
트로이는 브루투스가 머물 곳이 아니었다. 그리스 군대에 멸망한 지 오래된 탓에 사람이 살 곳이라고는 집 한 채조차 없었다. 그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옛 트로이 백성을 구해준 뒤 함께 트로이를 떠났다.
길을 헤매던 브루투스는 낯설고 황량한 마을에 도착했다. 아무도 그곳이 어디인지를 몰랐다. 그는 마을 한쪽에서 버려진 옛 신전을 발견했다.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하룻밤 이슬을 피하기로 하고는 여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려면 주인에게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브루투스는 신전 한쪽 구석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트로이를 떠난 뒤 힘든 여정이 이어진 탓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벽 무렵 브루투스의 꿈에 아르테미스 여신이 나타났다. 여신은 그에게 낯선 땅을 보여주었다. 서쪽으로 한참 달려가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사람은 거의 없고 거인족 여러 명만 살고 있었다.
“트로이의 브루투스여! 이곳은 네가 정착할 땅이 아니다. 내일 아침 서쪽으로 가서 바다로 나가거라. 올림포스의 신들은 너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았다. 네가 갈 곳은 바로 여기다.”
브루투스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르테미스 여신이 빙긋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일행에게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이 꿈에 나타나셨소. 그분은 나를 ‘트로이의 브루투스’라고 부르셨소. 여러분들도 앞으로는 나를 그렇게 부르도록 하시오. 이제 우리는 먼 길을 떠날 것이외다. 여신이 나에게 길을 가르쳐 주셨소.”
브루투스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티레니아해로 갔다. 거기서 용감한 장수 코리네우스가 이끄는 트로이 유민들을 만났다. 조국이 망한 뒤 귀향하지 못하고 지중해를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었다. 브루투스는 그들을 이끌고 오늘날 프랑스인 골 지방으로 가 투르라는 정착지를 세웠다.
며칠 뒤 이방인의 출몰에 놀란 골 족의 왕이 엄청난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브루투스는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뒀지만, 매번 희생자가 늘어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병력이 모자라 도저히 맞설 수 없게 됐다.
“코리네우스, 그리고 트로이 동포 여러분. 이곳은 우리가 정착할 땅이 아니오. 아르테미스 여신이 꿈에 나타나 보여주신 곳은 이곳이 아니었소. 다시 바다로 나가 여신의 뜻대로 새길을 찾도록 합시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제단이었다는 ‘런던 스톤’.
■트로야 노바와 런던
브루투스는 트로이 유민들을 이끌고 바다로 나섰다. 그들은 며칠 동안 밤낮으로 거센 파도와 싸워야 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배는 뒤집히지 않았고,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없었다. 파도는 배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요람의 아기처럼 잘 감싸 바다 너머로 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브루투스가 도착한 곳은 ‘알비온’이었다. 이 이름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라 섬으로서의 영국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브루투스가 도착한 곳은 영국 다트강 인근에 있는 토트너스였다. 그 도시에는 지금도 ‘브루투스 스톤’이라는 게 있다. 그가 영국에 도착했을 때 처음 밟은 게 그 돌이었다고 한다.
브루투스 일행 앞에 커다란 몽둥이를 든 거인들이 나타났다. 브루투스는 활을 사용해 거인들을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그는 거인족과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는 육지 깊숙이 들어갔다. 큰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날 템스라고 불리는 강이었다. 그는 강 주변에 마을을 세우고는 ‘트로야 노바’ 즉 ‘새로운 트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름은 ‘트리오반툼’으로 변했다. 영국으로 쳐들어온 로마는 이 도시를 ‘론디니움’으로 불렀다. 오늘날 영국 수도인 런던이 바로 그곳이었다.
브루투스는 트로야 노바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워 초대 국왕이 됐다. 영국을 영어로 ‘브리티시’라고 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브리티시라는 이름이 ‘브루투스’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브루투스는 궁전과 함께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만들었다. 오늘날 세인트폴 대성당 자리라고 전해진다. 런던에는 ‘런던 스톤’이 있다. 이 돌을 ‘브루투스 스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아르테미스 신전에 있던 제단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라고 한다. 브루투스는 24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늘날 런던 타워 인근에 있는 ‘타워 힐’에 묻혔다고 한다.
12세기 무렵 성직자였던 지오프리는 이런저런 전설을 모아 〈영국 왕들의 역사〉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 브루투스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지오프리 덕분에 트로이의 브루투스 전설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됐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