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안디지탈(脫)인 ③] LP는 잘도 도네, 돌아가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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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테이블 위에서 재생되는 LP판. 디지털 기술 등장으로 멸종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끈질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턴테이블 위에서 재생되는 LP판. 디지털 기술 등장으로 멸종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끈질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91년도였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 전축을 장만하셨을 때 처음으로 LP를 접했다. 당시 음악 자체보다도 턴테이블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LP판이 신기해 턴테이블을 만지다 아버지께 야단을 맞았다.

전축과 함께 딸려 온 LP판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음악은 뮤지컬 ‘캣츠’의 ‘메모리(Memory)’였다. 사실 나는 LP판보다는 저렴한 카세트테이프를 즐겨 구입했다. 길거리 리어카에서 팔던 ‘길보드’를 자주 애용했다.

일본 출장을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소니 ‘워크맨’을 선물로 주셨을 때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다. 그러더니 몇 년 뒤 디지털 방식의 CD가 등장했고, MP3까지 발전하더니 이제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 시대까지 와버렸다.

디지털 광풍 속에 LP는 곧 멸종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런데 아직 LP판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네안디지탈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을 직접 만나 LP음반의 매력을 들어봤다.


■보석 같은 곡을 발견하고 싶다면


부산항 북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카페 ‘산복도로370’ 내부 모습. 이 카페의 또 다른 매력은 LP로 재생되는 음악이다. 부산항 북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카페 ‘산복도로370’ 내부 모습. 이 카페의 또 다른 매력은 LP로 재생되는 음악이다.

부산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카페 ‘산복도로370’. 중구 망양로 370이 이곳의 주소다. 산복도로370 내부에는 오래된 물건으로 가득하다. 카운터로 사용하는 테이블부터 뒤주였다. 카페 가운데에는 오래된 수납장이 보였다. 그런데 이 수납장, 뚜껑을 열어 보니 축음기였다! 레버를 손으로 돌리면 태엽이 감겨 턴테이블이 자동으로 돌아갔다. 전기가 전혀 필요 없었다. 놀라웠다.



카페 산복도로370에 있는 축음기. 레버로 돌려 태엽을 감는 수동식이다. 카페 산복도로370에 있는 축음기. 레버로 돌려 태엽을 감는 수동식이다.

축음기용 판을 하나 골랐다. 일반 12인치(약 30cm) LP판보다 작은 크기로, 재질도 플라스틱이 아닌 철이었다. 판을 조심스럽게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회전시킨 뒤 바늘을 올리기 위해 철로 된 사운드박스를 잡았다. 차가웠다.

바늘이 판 위로 떨어지자 약간의 잡음이 섞인 음악이 흘러나왔다. 카페를 가득 채우는 흘러간 옛 노래에 흑백 영화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



카페 산복도로370에 있는 전축. 턴테이블 두 개가 장착돼 있다. 카페 산복도로370에 있는 전축. 턴테이블 두 개가 장착돼 있다.

산복도로370에는 수동식 축음기 외에도 턴테이블 두 개가 장착된 전축도 있었다. 이번에는 영화 ‘더티 댄싱’ 음반을 골라 음반의 먼지를 털어내고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탁” “탁” 튀는 소리가 이색적이었다. ‘더 타임 오브 마이 라이프(The Time of my Life)’가 흘러 나올 때는 패트릭 스웨이지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출 것만 같았다.


산복도로370의 김진간 대표. 김 대표는 “LP음반을 즐겨 들으면 타이틀 곡 외에도 보석같은 곡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산복도로370의 김진간 대표. 김 대표는 “LP음반을 즐겨 들으면 타이틀 곡 외에도 보석같은 곡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이 맛에 LP를 들어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턴테이블에 좋은 카트리지를 쓰지 않아요.”

김진간(35) 산복도로370 대표가 밝힌 LP음악의 매력이다. 문화인류학을 공부한 김 대표는 대학원 연구소를 박차고 나와 2018년 10월 산복도로370을 개점했다. 김 대표가 LP음악을 카페의 특징으로 내세운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산복도로370의 축음기와 전축, LP판 등은 동양화를 전공한 어머니의 수집품이었다. 현재 산복도로370에는 팝, 재즈 등 LP판 70여 장이 있다. 김 대표 집에는 100여 장이 더 있다.

김 대표가 꼽는 LP판의 가장 큰 장점은 보석 같은 곡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단 LP판을 한 번 걸면 끝까지 다 들어야 해요. 그래서 타이틀곡 외에도 숨겨진 좋은 곡을 들을 수 있죠.”

여기에다 앨범에 배치된 곡을 순서대로 음미하면 제작자의 의도까지 파악하게 된다. 마치 종이신문으로 뉴스를 읽을 때 편집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들을 때 곡이 조금이라도 싫증 나면 버튼 한 번으로 다음 곡으로 넘길 수 있다. 온전한 음악이 아닌 ‘파편’을 소비할 수도 있다.

김 대표는 “공간연출에서 음악은 굉장히 중요하다. LP판에서 골라낸 좋은 곡으로 큰 차별성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메마른 감성, LP로 깨우다


바이닐 펍 ‘뮤즈온’ 입구에 걸린 칠판. 바이닐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바이닐 펍 ‘뮤즈온’ 입구에 걸린 칠판. 바이닐이 무엇인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해운대구청 근처에는 아예 ‘바이닐 펍’을 내세우고 영업하는 ‘뮤즈 온’이 있다. 미국에서는 LP판을 통상 바이닐(Vinyl)이라고 부른다. 뮤즈온 입구부터 초록색 칠판에 흰 분필로 바이닐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친절한 설명이 반가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 아래 에릭 클랩튼의 ‘티어스 인 헤븐(Tears in Heaven)’이 귓속으로 구슬프게 흘러들었다. 역시 바이닐 펍이라서 그런지 카운터 뒤로 LP판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실내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래된 스피커와 축음기, 라디오는 흡사 1970~1980년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수많은 LP레코드와 오래된 스피커로 장식된 뮤즈온 내부. 수많은 LP레코드와 오래된 스피커로 장식된 뮤즈온 내부.

기네스 맥주 한 잔을 주문하자 소형 LP판으로 장식된 메모함도 함께 나왔다. 한참을 고민하다 비틀즈의 ‘헤이 주드(Hey Jude)’와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OST ‘웨이 백 인투 러브(Way Back into Love)’를 신청했다.

이어 키가 훤칠하고 준수하게 생긴 남성이 턴테이블로 다가와 익숙한 솜씨로 LP판을 갈아 끼웠다. 처음에 이 집 알바생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웬걸 사장님이란다. 그가 뮤즈온을 운영하게 된 것은 ‘가업’을 잇겠다는 일념 때문이라는데.



뮤즈온에서 맥주 등을 주문하면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 메모지도 함께 온다. 물론 LP레코드로 신청곡을 틀어준다. 뮤즈온에서 맥주 등을 주문하면 음악을 신청할 수 있는 메모지도 함께 온다. 물론 LP레코드로 신청곡을 틀어준다.

김지행(38) 대표는 마케팅 관련 일을 하다 5년 전에 회사를 그만 두고 뮤즈온을 열었다. 바이닐 펍을 열게 된 것은 레코드점을 운영하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산복도로370의 김 대표처럼 부모님의 도움을 톡톡히 받은 셈이다.

현재 뮤즈온에만 70~80년대 팝 음악 등 1만 장의 LP판이 있다. 이 모든 레코드 역시 아버지의 레코드점에서 가져 온 것이다. 가게를 장식하고 있는 오래된 축음기, 스피커, 오르간 등도 아버지의 수집품이었다고.

갑자기 주요 고객들의 연령대가 궁금해 물었더니, 김 대표로부터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주로 오시는 손님들은 20~30대 여성 분들이세요. 가족 단위 손님도 많이 오시고, 외국인들도 즐겨 찾습니다.”


뮤즈온 김지행 대표. 김 대표는 “LP판으로 듣는 음악의 음색이 따뜻해 감성을 잘 터치해준다”고 한다. 뮤즈온 김지행 대표. 김 대표는 “LP판으로 듣는 음악의 음색이 따뜻해 감성을 잘 터치해준다”고 한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한 20~30대 여성들이 LP음악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표는 “스트리밍으로 듣는 디지털 음악은 매끄럽기는 하지만 뭔가 깎아낸 듯한 느낌이다”면서도 “반면 LP음악은 음색이 좀 더 따뜻한 느낌이라 감성을 잘 터치해준다”고 설명했다.

LP음악에 입문하고 싶다는 생각에 김 대표에게 조언을 구했다. “시중에 10만 원에서 20만 원대의 저렴한 스피커 일체형 턴테이블이 많이 나와 있어요. 그 정도 턴테이블로도 LP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 있죠.”

뮤즈온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도 모르게 턴테이블을 검색하고 있었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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