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봉준호를 얻고, 한국 영화를 잃다
김남석 문학평론가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봉준호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연일 뜨겁다. 그의 영화적 이력뿐 아니라 가족과 교우 관계들이 주목을 받고 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속속 보도되고 있다. 우울한 소식에 한껏 지쳐 있는 국민들에게 그와 그의 영화는 하나의 쾌거이자 한국 영화의 금자탑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동시에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기생충’을 통해 조성되는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분명 고무적이지만, 이러한 고무적 분위기가 봉준호와 봉준호의 주변에만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기생충’으로 확장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생충’ 아카데미상 수상 고무적
한국영화 쾌거이자 금자탑 자리매김
봉준호와 그 주변에만 집중은 문제
지난해 눈에 띄는 한국영화 드물어
‘천만 관객 욕심’ 시장 원리에 잠식
영화적 상투성 극복 초심 되찾아야
‘기생충’은 놀라울 정도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영화였지만, 또한 놀랍게도 2019년 한국 영화 중 ‘기생충’을 제외하고는 일정한 성취를 거둔 영화가 매우 드물었으며, 영화적 창의성을 순도 높게 보여주는 사례는 아예 없었다. 마치 봉준호의 ‘기생충’에 전력을 쏟아붓고, 그 자리에서 고사한 인상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말에 일반 관객들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다. 여전히 한국 영화는 성업 중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극장에는 매년 적지 않은 한국 영화가 내걸리고 있고, 그중에는 천만을 넘은 영화가 나오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영화 관객 수는 매년 증가하는 것으로 조사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라는 매머드급 자본과 기술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영화적 창의성이었다. 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는 독자적인 영화 미학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거대 자본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방안을 나름대로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과 시도가 일정한 궤도에 오른 2000년대 초중반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한국 영화의 세기였다. 봉준호의 대표작 ‘살인의 추억’이나 이와 쌍벽을 이룬 한국 영화의 또 하나의 대표작 ‘올드 보이’도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홍상수와 김기덕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이창동과 김지운도 꾸준하게 우리 곁을 찾곤 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놀라운 창의성으로 새로운 한국 영화의 색깔과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한국 영화는 천만 관객을 필연적으로 욕심내야 하는 시장의 원리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영화 대자본에 저항하며 반격을 꿈꾸던 구도에서, 스스로 대자본이 되어 영화계를 거머쥐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찬 상태가 되었다고나 할까. 한국 영화 전반에서 천만 관객을 얻기 위한 질주가 시작되면서, 미래 세대나 그 저변에 대한 투자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느새 영화계를 장악한 대자본(주)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목전에서 성공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영화나 미학적 다양성을 간과하기 시작했다. 분명 한국 영화의 목표가 바뀐 것이다. 거칠게 말하는 것을 용서한다면, 이제는 영화적 순수함은 뒷전이고, 수익으로 환산 가능한 관객 수와 투자자금을 안전하게 회수할 수 있는 판에 박힌 제작 기조가 그 어떤 기준보다 영화계를 좌우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자 한국 영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상을 기회로 봉준호의 뛰어난 점과 봉준호를 키운 한국 영화의 한 측면은 놀랍도록 부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발생하고 있는 한국 영화의 극심한 불균형과 천만 관객에 대한 맹신과 영화적 상투성에 대한 위험 역시 놀랍도록 뻔뻔하게 외면되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봉준호를 얻고 한국 영화를 더욱 참담하게 잃는 아이러니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생충’의 수상이 반갑지만, 무작정 반길 수만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기회에 우리가 진정 되찾아야 할 것은 봉준호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의 초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