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빠던’을 아세요. 빠던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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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 문학평론가

코로나19가 생산한 신풍속도 중 한국 야구 수출은 기묘한 관심을 끈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과 겹쳐져서 더 그러하다. 박찬호가 활약하던 시절부터, 미국 야구(MLB)는 새로움 그 자체였다. 당시 중계에서는 박찬호 등판 일정에 맞추어 상대팀을 분석하고 그들을 이기기 위한 나름의 전략을 소개하곤 했다. 그리고 박찬호의 투구를 효율적으로 구경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메이저리그 팀들의 특성을 알아야 했다.

박찬호는 승리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했지만, 승패와 관계없이 미국 야구팀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것은 ‘기쁨’이었고, ‘앎의 확장’이었다. 이때 야구는 일종의 문화였고, 엄연하게도 개별 주체들의 역사였으며, 앎의 차원을 확장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당시 우리가 하고 있었던 일은 차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미국인, 코로나19로 한국 야구 시청

한국 타자 ‘빳다 던지기’ 접하게 돼

미국에선 비신사적 이유로 금기시

한국에선 개성 표출·열기 고조 행위


야구는 양국 국민에 서로 다른 문화

미지의 영역 알아가는 재미 ‘쏠쏠’


코로나19는 이 차이를 이해하는 일을 미국의 일로 돌려놓았다. 이제는 미국인들이 한국 야구(KBO)를 시청하게 되면서, 그들이 이전에는 몰랐던 미지의 영역에 접근하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한국 야구는 또 다른 문화였고 동시에 차이에 대한 이해였다. 미국을 뜨겁게 달군 한국의 ‘빠던(빳다 던지기의 약자)’ 문화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타격을 수행한 타자 중에는 홈런이나 장타를 의식하고 배트를 바닥에 강하게 내동댕이치는 쇼맨쉽을 내보이곤 하는데, 이때 그 광경을 목격한 관객들은 타격에서의 성취감을 견지하거나 증폭시킬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일종의 ‘내가 해냈다’는 표출이면서, ‘우리 함께 기뻐하자’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빠던은 미국에서는 금기시되는 행동이다. 신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금지된 관행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슬금슬금 금기를 허물었고, 급기야는 타자의 개성을 표출하고 열기를 고조시키는 행위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사실 빠던은 수비의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행위로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홈런을 맞거나 장타를 허용해 수비팀은 난처한 상황인데, 그러한 수비의 난처함을 모른 척하고, 성공의 희열에만 들떠 있는 태도는 어딘지 곱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팀은 이 빠던을 선택임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고의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우월감(성취감)을 자랑하고자 할 때가 있다. 빠던이 문제가 되는 것은 행위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행위 뒤에 감추어진 마음의 문제인 경우가 더욱 많았다.

하지만 문화가 된 야구는 이 행위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여지도 지니고 있었다. 가령 심각한 위기에서 삼진을 잡고 위기를 탈출한 투수는, 마운드에서 마음껏 포효한다. 강력한 제스처를 통해 ‘해냈다’는 기쁨을 분출하는데, 이때 공격팀도 이에 분노하여 다음 수비에서 빈볼을 던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 투수의 포효를 공격팀에 대한 무례한 도발이 아니라, 투수 자신과의 승리에서 얻은 만족을 승화시키는 행동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홈런을 쟁취한 후의 타자의 마음과 빠던도, 얼마든지 이러한 관점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미국 야구팬들에게 한국 야구는 변화된 이러한 관점도 소개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보여준다. 빠던은 신기하고 사소한 문화일 수 있었지만, 그 차이를 보여주는 존재들이 나란히 비교되는 순간 독창적이고 자율적인 체계가 될 수 있었다. 이 말은 우리의 빠던이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든 문화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두 유 노 빠던? 빠던은 실은, 문화였고, 그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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