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동근의 자투리 생각] 부산의 멋과 맛
부경대 중국학과 교수
부산은 압축적 근대화의 현장이다. 허물어질 듯하는 판잣집과 반짝반짝 빛나는 거대한 전광등을 설치한 고층 빌딩이 동시에 존재한다. 멀지 않은 바다에서 잠수를 하는 해녀가 있고, 그 옆에는 거대한 크루즈가 정박해 있다. 우뚝 솟은 금정산이 있는가 하면 세상을 품을 듯 쩍 벌린 백사장이 있다. 그리고 부산은 회색의 거대한 원자로를 작동시키면서 근대화의 신화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은 전혀 다른 데로 옮겨 가고 있다. 추억의 역사로 보이는 국제시장의 ‘꽃분이집’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세상 사람들은 타보지 못한 영화 ‘부산행’에 열광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뜨거운 관심도 몇 달 반짝이다 또한 번개처럼 사그라든다. 그래도 가장 많이 인상에 남는 것은 여전히 광안리와 해운대의 백사장, 그 거대한 베이를 감고 있는 음식점들과 유흥업소들이다. 외부 사람에게 있어서 부산은 그 정도이다.
부산은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인 도시
야성과 용기, 상상력 점차 잃고 있어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창조의 길 가야
하지만 부산의 진정한 매력은 따로 있다. 부산은 살아서 숨 쉬는 근대역사박물관이다. 골목마다 도시 역사의 추억이 있고, 전쟁의 아픔을 담은 다리와 계단들이 있다. 자갈치시장의 믿음이 담긴 아지매의 손과 주름살에서 묻혀 나오는 세월의 양념이 푹 담긴 음식들은 수백 명의 선원들을 한 번에 배불릴 수 있는 그런 무게감이 있다. 길게 늘어선 자갈치시장, 수영구 민락동 회 센터! 그 사이즈는 부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경관일지도 모른다.
여름철의 부산은 장관이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소리가 도시를 뒤엎고, 생맥주에 동동 떠있는 얼음들도 거침없이 목구멍으로 넘어 간다. 마치 히말라야의 빙하를 부산의 바닷물에 녹여서 만든 것처럼 머리끝까지 시원하게 한다. 하지만 아쉽게 부산 사람들은 이 맛을 잊은 지 오래다. 히말라야, 진령산맥, 대흥안령, 태백산백을 거쳐 대륙의 끝자락이 부산이라는 것. 부산은 히말라야 빙하의 맛을 잃은 지 오래다. 그 야성도, 그 용기도, 그런 상상력도!
부산의 정책 디자인을 보라! 해양 거점 도시로서 물류, 신남방과 신북방을 이어 주는 관문 도시로서 자리매김하는 정도의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국가 차원의 기능적 디자인을 걷어 치우면 매우 실용적이고 세속적이다. 세계 관광도시! 그것이 설사 부산을 금산으로 만든다 해도 별로 달갑지 않다. 왜냐하면 도시의 관광화는 결국 도시를 단순하게, 다리는 허약한데 배만 뚱뚱한, 움직일 수 없는 형태의 생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코로나19 같은 재난이 닥치면 경제적 피해를 가장 심하게 입을 수 있다. 단순한 관광화는 도시의 복원력을 취약하게 만들며, 병든 몸에서 나오는 악취는 부산만 갖고 있는 특유의 향을 상실케 만든다. 그래서 부산의 멋스러움은 부산의 자유분방하고, 진취적이고 용감하며, 거대한 상상력을 갖고 있는 공간에서 출발해야 한다. 만약 그것이 상실되어 간다면 그런 정신과 의지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코로나19는 히말라야산맥도, 부산의 앞바다도 쉬게 하였다. 거대한 물고기 형태의 대륙이 부산 앞바다에 지느러미를 담그고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생명체가 꿈틀거릴 때, 부산 앞바다에 담겨 있는 꼬리 쪽 지느러미의 물방울이 단번에 물고기의 눈알로 튕겨질 수 있다는 상상력을 잊지 말자!
부산은 아픈 것이 아니라, 지친 것이다. 한국 근대화의 최전선에서 수십 년간 달려 왔다. 이제 푹 쉬면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해야 한다. 부산의 멋과 맛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재료들을 찾아야 한다. 남이 만들어 놓은 맛의 레시피를 따라 하는 안전 모드로 가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시도하고 새롭게 도전하는 정신이 진정한 부산의 맛이고 부산의 멋이다.
노신은 “길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은 농업 시대의 길이다. 경험에 의해 열심히 축적한 것들을 모방하면서 앞 사람을 따라 가면 길이 열리는 것이다. 20세기에 부산은 과감하게 공업 시대의 길을 선택하였다. 과학과 기술, 논리에 의해 과감하게 설계하고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고속도로, 철도, 하늘길, 바닷길 수천 개의 다양한 형태의 길들을 만들어 내는 데 부산은 꿋꿋이 달렸다.
오늘날 부산은 새로운 멋과 맛을 내기 위해 어떤 길을 달려야 할까? 남이 만들어 놓은 레시피대로 이윤만 창출하는 길을 가야 하는가? 아니면 분점을 열어서 하나 정도는 히말라야 빙하를 부산 앞바다에 박아 놓는 과감한 창조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