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친일파 파묘 논란, 나라의 근간을 생각하라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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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되도록 이루지 못한 과거사 청산

'생애 전반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지사로 아름답게 살았고, 후반에는 민족을 배반해 일제에 부역한 부끄러운 변절자로 살았던 선조들을, 지금의 우리 역사 속에는 어떤 인물 꼴로 수용해야 옳은가?'

1996년에 나온 홍성원의 장편소설 <그러나>의 '작가의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 말의 앞뒤를 바꿔도 질문의 취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독립군 토벌에 앞장선 친일 군인이 있다고 치자. 나중에 나라를 위해 커다란 공로를 세운 또 다른 이력이 추가된다면 과거의 과오는 덮어질 수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은 지금 광복 75주년이 되도록 풀지 못한 해묵은 숙제 앞에 서 있다.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의 파묘를 둘러싼 과거사 청산 논쟁이 그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중 6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이들 중 친일 군인이 56명에 달한다. 사진은 서울현충원. 부산일보 DB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중 63명이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 이들 중 친일 군인이 56명에 달한다. 사진은 서울현충원. 부산일보 DB

■ 친일파 현충원 파묘 논란과 백선엽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서 파묘해야 한다." 이수진 민주당 의원이 당선인 신분인 지난달 24일 먼저 불을 지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가운데 63명이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 친일 군인이 56명으로 다수를 차지한다.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끌려가 군인이 된 사람이 아니다. 출세를 위해 적극적으로 복무한 사람들이다." 군 인권센터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논란의 정중앙에 서 있는 이가 백선엽이다. 올해 100세를 맞은 그는 생존해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친일 군인'과 '구국의 영웅'을 오가는 그의 이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향후 과거사 청산의 긴요한 잣대로서 매우 중대한 문제다.

그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1943~1945년 장교로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은 조선인이 토벌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일제가 조선인들로 채워 만든 정규 부대다. 같은 동포에 대한 학살과 토벌의 생생한 기록은 이미 역사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이 악명 높은 부대에 백선엽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일본어판에서 이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백선엽은 해방 후 일본군에서 한국군으로 군복을 갈아입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역이 된다. 6·25 전쟁 때는 낙동강 방어선인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평양 진공 작전의 선두에 서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 그의 생애를 설명하는 주요한 수식어가 된 것이다. 이 변신이 사후 현충원 안장이라는 마지막 소망까지 견인하고 있다.

그의 간도특설대 복무는 본인도 인정한 팩트다. 그러나 실제로 독립군과 싸우고 조선인을 때려잡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는 부정한다. 이는 정확한 규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 의혹이 해소된 이후에야 현충원 안장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친일 의혹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후의 공로만 평가하는 것은 균형을 상실한 잣대다.


2016년 영화 '밀정'은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다룬다. 부산일보 DB 2016년 영화 '밀정'은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다룬다. 부산일보 DB

■ 각국 과거사 청산 사례를 보니

광복 75주년을 맞았는데도 아직도 이런 문제로 갈등을 빚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친일 청산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걸 방증한다. 다른 나라의 과거사 청산 사례는 어땠을까. '톨레랑스(관용)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4년 동안의 수치와 트라우마를 씻기 위해 엄중하고 단호한 조처를 취했다. 해방 직후 2년간 비시정부 최고위급 인사들이 줄줄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유죄 선고를 받은 부역자들이 10만 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3만 8000명이 수감되고 1만여 명이 처형됐다. 1980~90년대 들어 반인륜 범죄에 대한 또 다른 재판이 시작됐다. 그동안 교묘하게 처벌을 피해 나간 사람들을 법정에 세우기 위해서였다. 정의가 관용 못지않은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프랑스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열강에 둘러싸여 역사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아픔을 겪은 나라가 폴란드다. 그러나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먼저 민주화 이행을 시작했고 유럽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철저한 과거사 청산 작업이 우리와 다르다. 1997년 정화법을 제정하고 국가기억원을 세워 과거의 비밀문서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가기억원에는 검사를 파견해 비밀경찰에 협력한 사람들을 파악, 공직에서 배제하고 기소와 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 우리와 비슷한 스페인의 경우

지금 상황에서 우리와 가장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는 나라가 스페인이다. 지난해 10월, 독재자 프랑코의 유해가 '전몰자의 계곡' 특별묘역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로 치면 '파묘'다. 지난해, 사회노동당 출신 총리의 적극적인 의지에 의회가 화답한 결과다. '전몰자의 계곡'은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 후 세운 추모 시설이다. 해발 900여m 높이의 화강암 산꼭대기에 152.4m나 되는 큰 십자가가 서 있고 산 아래 암반 속에 축구장만 한 지하성당이 있는 거대한 규모다. 독재자 프랑코는 화해를 명분으로 여기에 공화군과 프랑코군 양쪽 전사자 3만 3000명을 안장했다. 프랑코 자신도 40년 철권통치 뒤 묘역 중 가장 좋은 자리에 묻혔다.

그러나 이 거대한 시설은 공화군의 정치범들을 강제로 동원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독재자의 죽음과 독재자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포개놓은 것 자체가 공화국에 대한 조롱이요 모욕이며 기만이다. 결국 스페인 사람들은 독재자의 무덤을 열고 적폐 청산을 택했다. 프랑코 사후 44년 만이다. 20여 년 전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는 걸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프랑코는커녕 그 후계자들조차 단죄하지 못한 자신들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전언이었다. 그만큼 스페인은 파시즘을 그리워하는 극우파와 기득권 집단의 영향력이 난폭한 나라다. 그런 스페인이 과거사 청산에 적극 나선 것이다. 프랑코의 파묘가 바로 그 선언이었다.


스페인 산 로렌조 데 엘 에스코리알에 위치한 명소 ‘전몰자의 계곡’ 국립묘역. 독재자 프랑코가 화해를 명분으로 공화군과 프랑코군 양쪽 전사자 3만 3000명을 안장한 추모 시설이다. 부산일보 DB 스페인 산 로렌조 데 엘 에스코리알에 위치한 명소 ‘전몰자의 계곡’ 국립묘역. 독재자 프랑코가 화해를 명분으로 공화군과 프랑코군 양쪽 전사자 3만 3000명을 안장한 추모 시설이다. 부산일보 DB

■ 한치 빈틈없는 청산 작업을 위해

앞서 언급한 홍성원의 소설 <그러나>는 일제 강점기라는 불행한 시대를 살다 간 두 사람의 삶을 좇는다. 독립투사와 친일파로 알려진 두 사람의 실체는 결국 뒤바뀐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한쪽은 말년에 친일파로 전향했고, 오히려 악질 친일파로만 알려져 있던 다른 쪽이 남몰래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항일전선에 나섰음이 드러난다. 인간들이 몸 부비며 사는 현실이란 기실 선악과 긍·부정의 경계가 무시로 흐려지는 혼돈과 무질서의 장이다. 항일-친일의 단순한 구분이 얼마나 많은 복잡성의 희생 위에 성립하는 것인지 보여준다 할 것이다. 과거 청산과 역사의 반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틈새를 놓치지 말자는 얘기다.

그렇다 하더라도 특수하고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화함으로써 꼭 필요한 판단과 평가조차 방기하거나 생략해서는 곤란하다. 현충원에 안장된 사람들의 친일 전력이 어디까지 진실한지는 전문가들에게 맡길 일이겠지만, 최근 친일파 파묘 논란은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으나 해방 이후 국군 창설 과정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기에 무죄"라는 일각의 논리는 대한민국 경찰과 국군의 뿌리가 일제 군대와 치안 당국임을 사실상 인정한 꼴이라는 것. 이 실토는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나아가 해방 이후 공로를 세웠다고 해서 일제 부역의 잘못이 면제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뼈대를 완전히 뒤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응당 부끄러워해야 할 역사 인식이다. 친일과 변절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독립투사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족까지 등지고 온몸을 던진 것이다.

과거사 청산은 정치 논리를 들이댈 사안이 아니다. 무조건 친일파를 파묘하자는 강박이 아니다. 백선엽 장군처럼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경우 공론화 과정을 통해 공과를 따져 합리적인 법 절차에 따르자는 얘기다. 그래서 민의의 전당인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고여 있는 역사, 이제는 흐르게 해야 한다. 스페인의 사례에서 보듯, 정의는 더디고 더디지만 결국 실현될 것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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