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뷰] 꺼뜨리지 말자, 상생 불씨
이호진 해양수산부장
옛 현대상선에서 이름을 바꾼 국내 대표 원양 해운업체 HMM이 8~10월 석 달 연속으로 예정에 없던 컨테이너선 4척을 미국으로 띄웠다. 배에는 납기가 임박한 국내 수출업체들의 화물이 가득 실렸다. 배경은 이렇다. 올해 초 코로나19 세계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글로벌 해운 선사들이 선박 투입을 줄여 선박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 선원과 화물을 선박에 싣고 내리면서 코로나19를 전파할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드물게 선원 교대를 허용하고, 선박 투입도 정상적으로 한 우리나라에선 내국인 선원 감염 사례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화물이 늘어나기 시작한 하반기 들어서는 메인 항로인 중국발 미국 항로에만 글로벌 선사 선박 투입이 집중되면서 국내 화주들의 고충이 더 심해졌다. 화주들의 절박한 외침에 HMM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HMM과 국내 제조업체, 정부 등 각계에서 ‘이번 일을 선·화주 상생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가 한목소리로 나온다.
HMM, 미국행 수출화물 석 달째 긴급 운송
오랜 국내 선·화주 상극 관행에 잔잔한 파장
조선 키운다고 선사 경쟁력 떨어뜨린 금융
통합 관점서 정책 집행할 더 큰 해수부 필요
우리나라 해운업을 둘러싼 화주(제조업), 조선, 금융 등 관련 업계의 관계를 돌이켜 보면 상생보다는 상극의 역사가 길다. 지난달 국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우리나라 수출입 물량을 우리나라 배가 나른 비율(국적선 적취율)은 45.3%에 그친다. 일본은 63.6%다. 국내 선두권 재벌그룹 산하 물류 회사들은 최저가 입찰제로 한 푼이라도 싼 해외 선사를 선택한다. 어쩌다 운 좋게 국내 선사들이 계약해도 안정적인 장기 계약은 꿈도 못 꾼다. 또 다른 대형 화주인 포스코가 물류 자회사를 차린다는 데 해운업계가 왜 그렇게 반발하고 나서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조선이라고 상황이 나은 게 아니다. HMM은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 등 공적 자금 투입 기관을 대주주로 맞은 뒤 국내에서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 12척을 지었다. HMM이 민간 소유였더라도 국내에 발주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2017년엔 국내 선사들이 가격이 싼 중국 조선소에 물량을 잇달아 발주하면서 해운업계와 조선업계 사이에 심각한 갈등 기류가 형성된 선례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금융이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 등 국책금융기관들이 해외 선사에 지원한 선박금융 규모가 124억 달러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다. 반면 국내 선사에 돌아간 지원은 26억 달러에 불과하다. 정책금융기관들이 국내 조선소에서 배를 짓는 조건으로 해외 선사에 뭉칫돈을 안긴 것이다. 세계 1위 선사인 머스크는 수출입은행에서 16억 달러를 지원받아 대우조선해양에서 당시 최대 규모인 1만 8000TEU(20피트 컨테이너 단위)급 컨테이너선 20척을 지었다. 국내 선사들이 유동성 부족으로 새 배 건조는 언감생심, 구조조정에 매달릴 때 조선 분야에는 정책금융이 쏟아져 업계는 환호성을 지르는 극단적인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또 시간이 지나고 보니 국내 선사는 따라가지도 못할 만큼 글로벌 선사들의 고효율·초대형 선박 보유 규모는 커져 버렸다.
우리는 중국처럼 세계무역기구(WTO) 눈치 보지 않고 업계에 보조금을 뿌릴 여건이 안 된다. 일본처럼 민간 자율협력의 역사가 길지도 않다. 비록 작은 첫걸음에 불과하지만, HMM이 국내 화주들의 아우성을 외면하지 않은 이번 기회가 어쩌면 우리나라 해운·화주·조선·금융 상생의 마지막 불씨일 수 있다. 눈앞의 돈 몇 푼 때문에 전후방 산업 체질을 약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결국 나도 병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날로 격해지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당장 작은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전후방 업계를 돕는 것이 결국은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 그 신뢰를 쌓는 일이 중요하다. 우선은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이 그 신뢰의 뿌리를 든든히 받쳐 줘야 할 것이다.
지역 시민사회 일각에서 논의되는 해양수산부 업무 영역 확대 필요성도 이런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물류 수산 해운 조선 항만 금융 등 연계성 높은 분야를 아우를 거시적인 정책 관점이 필요하다. 실제 뿌리가 다른 아마존과 머스크 등의 글로벌 업체가 하나같이 4차산업혁명 기술로 무장하고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물류 플랫폼 기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바다 일만 해수부가’라는 낡은 잣대를 과감히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훗날 ‘그때 기회를 놓쳐 우리가 이렇다’는 한탄을 또 늘어놓기 싫다면 말이다. jiny@busan.com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