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신춘문예-희곡] 노을이 너무 예뻐서/박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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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남자 (30대 중반) 여자 (20대 중반)

때: 어느 초겨울

장소: 도로 위

무대: 무대 중앙에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오토바이가 한 대 서있다. 오토바이 앞쪽에는 자동차 신호등이 하나 서 있다. 나머지 한쪽엔 도로와 인도를 구분할 수 있는 연석이 있고, 인도 위에 등받이가 있는 벤치가 있다.

1.

무대 밝아지면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 남녀가 앉아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달린다.

자동차들이 빨리 달리는 소리와 경적 소리가 정신없이 뒤섞인다.

잠시 후 초록불이던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오토바이가 잠시 멈춘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여자 가 헬멧을 열어젖히며 앞자리의 남자에게 말을 건다.

여자 우리 달린 지 얼마나 됐어요?

남자 한 시간?

여자 기름은 얼마나 남았어요?

남자 음, 절반 조금 넘게요.

여자 그럼 얼마나 더 갈 수 있죠?

남자 적어도 두, 세 시간은 더 달릴 수 있어요.

여자 어디까지 갈 거예요?

남자 생각 안 해봤어요.

여자 그럼 얼마나 더 갈 거예요?

남자 그것도 생각 안 해봤어요.

여자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남자 네?

여자 저 보다 나이 많아 보이던데,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남자 …… 편한 대로 불러요.

여자 오빠는……

여자가 무슨 말을 더 이어가려고 하는 찰나, 신호등이 다시 초록불로 바뀐다.

오토바이는 다시 한참을 달린다.

여자 배 안 고파요?

남자 네?

여자 (더 큰 소리로) 배, 안 고프냐고요!

남자 아…… 조금요.

여자 (더 큰 소리로) 뭐라고요?

남자 (큰 소리로) 배, 고프다고요.

여자 (웃으며) 그럼 밥 먹으러 가요. 우리 얼마 남았죠?

남자 9만 원 정도요.

여자 우와. 비싼 거 먹어도 되겠다.

남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여자 오빠는 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먹을 수 있다면 뭘 먹을 것 같아요?

남자 (잠시 고민하다) 감자전이요. 어머니가 해 주신.

여자 그건 지금 못 먹잖아요.

남자 그럼 그쪽은 뭐 먹을 거예요?

여자 전, 한우요.

남자 한우 먹으러 가요.

여자 9만 원으로요?

남자 조금만 먹으면 되죠.

오토바이가 다시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다.

여자 에이, 오늘은 배부르게 먹고 싶은데.

남자 그럼 배부르게 먹고 도망갈까요?

여자 네? 어떻게요?

남자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몰래?

여자 요즘 그런 거 안 돼요. 걸리면 경찰서 가요.

남자 안 걸리면 되죠.

여자는 남자의 말이 어이없는 듯 크게 웃는다.

여자의 웃음소리를 들은 남자도 따라 웃는다.

여자 진짜 오랜만에 크게 웃는 것 같아요.

남자 그 말이 그렇게 웃겨요?

여자 너무 어이없잖아요. 한우 먹고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남자 먹고 싶다고 하니까.

오토바이가 다시 출발한다.

여자 그냥 달리다가 맛있어 보이는 데로 가요.

남자 그럼 그쪽이 골라요. 난 다 괜찮아요.

여자 딴말하기 없기에요? 뭐가 맛있으려나.

남자 9만 원 잊지 마요.

여자 알겠어요.

여자가 열심히 식당 간판을 눈으로 좇는다.

그러다 한 곳을 발견하고 소리친다.

여자 어! 저거! 저거 먹어요!

남자 어디요?

여자 저기! 소꼬리찜! 나 저거 한 번도 안 먹어봤어요.

남자 소는 소네요. 저기로 가요.

남자가 차선을 바꾸려고 하는데 옆에서 승용차가 끼어들며 경적을 울린다.

남자가 놀라 오토바이가 크게 휘청거린다.

여자 어, 어. 조심!

남자 놀래라.

여자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남자 아니에요.

여자 깜짝이야. 죽는 줄 알았네.

남자 그러게요. 죽을 뻔 했네.

남자와 여자 웃는다.

오토바이가 식당 앞에 멈추고 둘은 내린다.

여자 (신나게 헬멧을 벗어 오토바이에 걸치며) 아, 기대 된다. 빨리 가요. 빨리!

남자 알았어요. 먼저 들어가요.

여자 먼저 가서 주문해 놓을게요.

여자, 무대에서 사라진다.

남자는 지갑을 꺼내 현금을 확인하려다 그 안에 신분증이 잘 있는지 확인한다.

그 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담뱃갑 안의 담배 개수를 확인하고 다시 집어넣는다.

사이드미러를 보며 머리를 매만진다.

무대 어두워진다.

2.

무대 밝아지면, 여자와 남자가 식당에서 나오고 있다.

여자 진짜 맛있었다. 오빠는 꼬리찜 먹어 봤었어요?

남자 아뇨. 저도 처음 먹어 봤어요.

여자 오빠 덕분에 맛있는 거 먹어 보네요. 고마워요.

남자 그쪽이 메뉴 골랐잖아요.

여자 오빠랑 같이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그 식당을 발견한 거니까 오빠 덕분이죠. 제가 사는 동네에는 소꼬리찜을 파는 곳이 없거든요. 뭐, 물론 있었어도 못 먹어 봤겠지만.

남자 그게 그렇게 되나.

여자 매운 거 먹으니까 시원하게 아이스커피 먹고 싶다. 우리 커피 마시면 안 돼요?

남자 커피요?

여자 여기 앉아서 먹고 가요. 날씨도 좋고, 밖에서 먹고 싶어요. 아, 너무 늦으려나?

남자 아니에요. 시간 맞춰서 가야 되는 것도 아닌데. 먹고 가면 되죠. 그럼 금방 사올게요. 여기 잠깐만 앉아있어요.

여자 네.

남자, 커피 사러 나가고 여자는 벤치에 앉는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고 손거울을 꺼낸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진다.

여자 헬멧을 쓰니까 머리가 다 눌리네. 예쁜 모습이고 싶은데. 헬멧을 안 쓰면 벌금인가? 아니면 뒤에 타고 있는 건 괜찮나. (잠시 생각하다) 하긴, 상관없겠지.

남자가 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여자 왔어요? 커피다, 커피.

남자 근처에 편의점밖에 없어서…….

여자 괜찮아요. 편의점 커피도 맛있어요.

남자 그래도 마지막 커피인데…….

여자 그럼 가다가 진짜 예쁜 카페 있으면 거기 들어가요. 우리 얼마 남았죠?

남자 2만 원 정도?

여자 그 돈이면 카페 갈 수 있겠네요. 거기서 제일 비싼 메뉴 먹어야지. 오빠도 비싼 거 먹어요.

남자 그래요.

여자 이런 여유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이 시간에 이렇게 밖에 있는 것도 오랜만이고.

여자의 밝은 모습에 남자는 생각이 많아지는 듯 담배 한 개를 입에 문다.

그리고는 담뱃갑 안의 담배 개수를 센다.

남자 (혼잣말로) 두 개…….

여자 뭐라고 했어요?

남자 아,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여자 담배 펴요?

남자 네.

여자 저도 한 개만 줘요.

남자 담배 펴요?

여자 예전에 잠깐요.

남자는 망설이다 하나를 꺼내 여자에게 준다.

남자 …… 혹시 무슨 일 해요?

여자 왜요?

남자 그냥, 밝아 보여서.

여자 그냥, 일하죠. 이것저것.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하고 계속 일만 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최근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남자 왜요?

여자 일이 좀 있었어요. 오빠는 무슨 일 해요?

남자 전…… 저도 그냥 일해요.

여자 나랑 똑같네.

여자, 웃는다.

남자, 웃는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 고양이를 한 마리 키웠어요.

남자 …….

여자 꽤 오래 키웠어요. 학교 그만두고 일 시작하면서 혼자 살게 됐는데,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강아지보다 고양이가 낫다고 하더라고요. 외로움을 덜 탄다고.

남자 그렇구나.

여자 근데, 키워보니 아니에요. 고양이도 똑같이 외로움을 타요.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가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들어가자마자 막 나한테 다가와서 다리에 얼굴을 비벼대요. 마치 ‘왜 이제 왔어. 나 하루 종일 심심했어.’ 하는 것처럼.

남자 귀엽네요.

여자 귀엽죠. 근데 그게 너무 안 된 거예요. 햇빛도 잘 안 들어오는 좁은 방에 하루 종일 혼자서.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월급을 쪼개서 캣타워도 사고, 혼자서 놀 수 있는 장난감도 샀어요. 근데 나는 고양이가 그걸 쓰는지 안 쓰는지 몰라요. 맨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니까.

남자 그럼 한 마리 더 데리고 오지 그랬어요. 두 마리면 외로움을 덜 타지 않나요?

여자 변명 같지만, 고양이들은 예민해서 새로운 고양이가 오면 합사라는 걸 해야 된대요. 뭐, 공간을 따로 분리해서 서로 적응시켜주는 기간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제 방은 원룸이라 분리할 공간이 없었어요. 그럴 시간도 없었고요.

남자 아…….

여자 그런데 몇 년을 그렇게 같이 살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고요. 오히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고양이가 부러웠어요. 얘는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겠구나 싶어서.

남자 그러게요. 평생 잠만 자도 먹을 것 걱정, 잠잘 곳 걱정 안 해도 되고, 부러운 삶이네요.

여자 그런데 얼마 전에 고양이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어요.

남자 네? 갑자기 왜요?

여자 모르겠어요. 아마 꽤 오래전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제가 몰랐던 것 같아요.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집에 오면 자기 바빴거든요. 고양이의 상태를 살필 정신이 없었던 거죠. 여느 날처럼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현관 앞에 고양이가 없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밥을 주려고 그릇을 보니까 밥이 그대로인 거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고양이를 찾았는데 구석에…….

남자 저런.

여자 일도 안 나가고 몇 날 며칠을 울었어요. 죽고 나서 울면 무슨 소용이겠냐 마는, 너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아이의 세상엔 나밖에 없었는데, 마지막까지 무심한 주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이

여자 근데, 그 모습이 마치 내 모습 같았어요. 아무도 모르게 쓸쓸하게 죽어간 내 고양이처럼, 나도 아무도 모르게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는데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남자 저기 미안한데, 너무 감정이입한 거 아니에요?

여자 그런가요?

남자 미안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 고양이도 안됐지만, 너무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여자 그럴 수도 있죠. 이제 출발할까요?

남자 내가 실수했나요? 미안해요.

여자 아니에요. 제가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너무 주접이었어요. 해지기 전에 출발해요.

남자 그래요.

남자와 여자,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여자는 헬멧을 쓰려다 쓰지 않는다.

남자 헬멧 안 써요?

여자 안 쓸래요.

남자 위험할 텐데.

여자 괜찮아요.

남자 ……그럼 바구니에 넣을게요. 줘요.

여자 고마워요.

남자 출발할게요.

오토바이는 다시 달린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다.

오토바이는 점점 시 외곽으로 달린다.

남자 이제 외곽으로 나왔네요. 안 추워요?

여자 안 추워요.

남자 얼마나 더 갈까요?

여자 얼마나 더 갈 수 있어요?

남자 마음은 아직 그대로죠?

여자 네.

남자 그럼 그쪽이 원하는 만큼 가요.

여자 ……일단 더 달려요. 오토바이 위에서 바람 맞는 거 생각보다 기분 좋네요.

남자 이제 어디가 나올지 저도 몰라요.

여자 괜찮아요! (큰 소리로) 아, 좋다!

여자, 오토바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두 팔을 크게 벌린다.

남자 어! 위험해요.

여자 괜찮아요.

남자 손잡이 잡아요!

여자 아, 좋다!

남자 (오토바이 속도를 줄이며) 손잡이 안 잡으면 나 멈출 거예요?

여자 치, 알았어요.

여자, 아쉬워하며 손잡이를 다시 잡는다.

여자 잡았어요. 손 안 놓을 테니까 빨리 달려요.

남자 한 번만 더 놓으면 버리고 갈 거예요.

여자 네, 네.

남자, 속도를 다시 높인다.

여자는 밝은 표정으로 주변 풍경을 구경한다.

남자는 계속 사이드미러로 여자를 힐끗 쳐다본다.

남자 저기요.

여자 네?

남자 근데 왜 죽고 싶어요?

여자 네?

남자 왜 죽고 싶냐고요.

여자 …….

남자 혹시 고양이 때문에 죽고 싶다는 건 아니죠?

여자 그렇다면요?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삽화=류지혜 기자 birdy@busan.com

오토바이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다.

여자 앞에 차도 없는데 그냥 신호 무시하고 달리면 안 돼요?

남자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여자 뭐가요?

남자 진짜 고작 고양이 때문에 죽으려고 한다고요?

여자 고작 고양이요?

남자 네. 고작 고양이요.

여자, 남자의 말에 화가 나 오토바이에서 내려 인도로 걸어간다.

남자 놀라서 급하게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내려서 여자를 따라간다.

남자 미쳤어요? 도로 한복판에서 갑자기 내리면 어떡해요? 그러다가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여자 뭐 어때요?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같은데. 왜 따라와요?

남자 처음에 한 말 잊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는 주지 말자고 했잖아요. 그래서 차가 거의 없는 외곽으로 가는 거고.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가버리면 따라오지, 안 따라와요? 여기 내려서 뭘 어떻게 할 건데요?

여자 생각 안 해봤어요.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움직인 적 있나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내려서, 마음 가는 대로 걸어왔어요. 왜요?

남자 아니, 내 말이 그렇게 기분 나빠요? 반려동물의 죽음이 너무 슬퍼서 자살하겠다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요?

여자 그게 어때서요?

남자 어때서냐고요?

남자는 여자의 말에 화가 나지만 애써 참으며 이야기한다.

남자 그렇게 충동적인 이유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같이 오지도 않았어요.

여자 무슨 이유인지가 왜 중요한데요? 내가 시시콜콜 그쪽한테 ‘저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죽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해서 그쪽을 이해시켜야 하는 거예요? 그쪽이 생각하기에 죽을 만한 이유가 아니면 말리기라도 하려고요?

남자 그 말이 아니잖아요.

여자 그러는 댁은 그럼 대체 무슨 이유인데요? 뭐 얼마나 대단한 이유길래 그렇게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는 건데요?

남자 나는! 보험금이 필요해요.

여자 역시 돈 때문이네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남자 네. 역시 그놈의 돈 때문이에요. 돈 말고 더 큰 이유가 있을 게 있나요?

여자 아뇨. 너무 당연해서요.

남자 내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빠른 시간 안에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요. 자살하면 보험금이 안 나오니까, 사고로 보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뭘까. 실패 없이 한 번에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요. 당신처럼 고상하게 반려동물 죽음 따위에 슬퍼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나는 오늘 꼭 죽어야만 한단 말이에요!

정적이 흐른다.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정적을 채운다.

여자, 벤치로 가 털썩 앉는다.

남자 …… 미안해요.

여자 어릴 때, 원장님이 늘 하던 말이 있었어요. ‘고상해야 한다.’

남자 원장님이요?

여자 네. 제가 살던 보육원의 원장님이요.

남자 (화를 낸 것이 살짝 미안한 듯 벤치로 가 앉으며) 보육원…….

여자 거기 원장님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고아인 것 티 안 나게 고상하게 행동해야 한다. 너희들이 바르게 행동해야 내가 욕을 안 먹는다.’였어요. 정작 원장님은 욕을 입에 달고 사셨지만요.

남자 아이러니하네요.

여자 제가 아까 학교 그만두고 일 시작했다고 했었잖아요. 그거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원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퇴소하게 되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이 갑자기 많아지면서 눈치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독립하게 됐죠.

사이

여자 고양이는 어릴 때부터 너무 키우고 싶었어요. 초등학생 때, 같은 반 친구가 자기 동생이라면서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는데 얼마나 예쁘던지……. 어린 마음에 원장님한테 이야기했다가 쫓겨날 뻔했어요. 그래서 독립하면 고양이 키우는 게 첫 번째 꿈이었죠. 처음으로 생긴 내 가족이었어요.

남자와 여자, 잠시 말이 없다.

남자가 어렵게 입을 뗀다.

남자 제가 사이트에 같이 죽을 사람 찾는다고 글 썼을 때, 댓글 단 여러 사람 중에 왜 당신한테만 쪽지 보낸 줄 알아요?

여자 어? 쪽지를 저한테만 보냈다고요?

남자 네. 당신한테만 보냈어요.

여자 몰랐어요. 전 그냥 그 댓글 단 사람들 중에 마침 저랑 시간이 맞은 줄 알았는데.

남자 글을 쓰면서 같이 갈 사람이 충동적으로 가자고 했다가 중간에 돌아가자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어요. 그래서 쪽지 보내기 전에 댓글 단 사람들 아이디로 글 쓴 거 다 검색해 봤었어요. 유일하게 아무 글도, 댓글도 안 쓴 사람이 당신이었어요. 그래서 더 확신이 들었어요. ‘아, 이 사람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진짜구나.’하고요. 당신이랑 연락되고 나서는 제가 썼던 글도 지웠고요.

여자 만약 제가 어제라도 갑자기 안 간다고 했으면요?

남자 그럼 저 혼자 갔을 거예요.

여자 그럼 처음부터 혼자 가면 되지 같이 갈 사람은 왜 구한 거예요?

남자 누군가는 죽음을 알아줬으면 해서요. 죽기로 마음먹고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엄청 외롭더라고요. 그래도 ‘나, 이렇게 노력했다.’라는 걸 단 한 명이라도 알아주면 내 행동에 확신이 생길 것 같았어요.

여자 오빠, 사실은 죽고 싶지 않은 거죠?

남자는 여자의 말을 못 들은 척 말을 돌린다.

남자 젊은 여자 분인 거 알고는 더 좋았어요.

여자 뭐예요. 갑자기 무섭게.

남자 (당황하며) 아, 아니. 뭘 어떻게 해보겠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발견됐을 때 그래도 연인으로 보이면 의심을 덜 사지 않을까 해서요. 여행 가다가 사고가 난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여자 연인이요? 저 여태 남자친구 사귀어본 적 없는데. 죽고 나서 애인이 생기겠네요.

여자와 남자 웃는다.

어느새 하늘엔 노을이 진다.

남자, 노을을 멍하니 바라본다.

남자 노을 지네요.

여자 네. 그렇네요.

남자 노을…… 정말 오랜만에 봐요. 이 시간에 이렇게 밖에 있었던 적이 없어서.

여자 저도요.

남자와 여자가 한참 동안 노을 감상에 빠진다.

둘의 표정이 점차 평온해진다.

여자 노을 정말 예쁘네요.

남자 그쪽도 예뻐요.

여자 네?

남자 너무 예뻐요. 이렇게 죽기 아깝다고요.

여자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남자 사실 오늘 그쪽을 만나고 후회했어요.

여자 왜요. 제가 마음을 바꿀 것 같아서요?

남자 아뇨. 제 생각보다 너무 젊어서요. 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자 더 살면 달라질까요?

남자 그건 모르죠. 하지만 아직 산 날보다 살 날이 더 많이 남았잖아요. 여태까지의 삶은 힘들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조금 더 노력해볼 수 있잖아요.

남자의 말에 여자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남자는 괜히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만지작거린다.

여자 그럼 오빠도 살아요.

남자 전 지금 당장 큰돈이 필요해요.

여자 돈이 왜 필요한지, 얼마나 필요한지는 안 물어볼게요. 그런데 꼭 죽어야지만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 돈만 있으면 안 죽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남자 하지만…….

여자 저 열심히 일만 해서 모아놓은 돈 좀 있는데, 그거라도 빌려드릴까요?

남자 네?

여자 오빠, 사실은 죽고 싶지 않잖아요.

남자, 여자의 말을 듣고 옅은 미소를 짓는다.

남자의 표정을 본 여자도 미소를 짓는다.

남자 알겠어요. 돌아가요. 그런데…….

여자 해 지는 거만 다 보고 돌아가요.

남자 어? 저도 그 말 하려고 했어요.

여자 통했네요.

남자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린다) 노을이 너무 예뻐서…….

남자와 여자 말없이 노을을 바라본다.

무대 어두워진다.

3.

늦은 밤, 여자의 집 앞이다.

여자가 남자를 배웅하고 있다.

둘은 마치 연인 사이처럼 보인다.

여자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집 앞까지는 안 와도 되는데.

남자 우리가 생각보다 너무 멀리까지 갔었나봐요. 지금은 너무 늦어서 버스도 없어요.

여자 연인 사이가 될 뻔해서 그런지 몰라도 남자친구가 바래다주는 거 같네요. 애인이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게 이런 기분인가?

남자 아마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다정하겠죠?

여자 (웃으며) 반가웠어요.

남자 저도요.

여자 오늘, 즐거웠어요.

남자 저도요.

여자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멈춘다.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여자 조심해서 가요.

남자 네. 얼른 들어가요.

여자,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낸다.

여자 현금이 이것밖에 없네요. 얼마 안 되지만 가다가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먹어요. 새벽에 오토바이 타면 춥잖아요.

남자 괜찮아요. 저 돈 있어요.

여자 고마워서 주는 거예요. 받아줘요.

남자, 잠시 망설이다 여자가 건네는 돈을 받는다.

남자 그럼, 잘 먹을게요.

여자 별말씀을요. 저 들어갈게요. 조심해서 가요.

남자 네, 네. 얼른 들어가요.

여자, 무대에서 사라진다.

남자,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손에 쥔 지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언가를 잠시 고민하는 듯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담뱃갑 안을 보는데 비어 있다.

잠시 안을 바라보던 남자는 담뱃갑을 구겨 던져버린다.

이내 결심한 듯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출발한 남자는 잠시 후 어딘가에 도착하고,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남자 저기요. 여기 기름 만땅으로 채워 주세요.

무대 어두워지며 뉴스앵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난 밤 중구의 한 원룸에서 자살로 추정되는 여성의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발견 당시 현장에는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동물사체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황상 피해 여성은 평소 상당한 우울증을 겪으며 사체를 방치한 채로 생활을 해 왔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뉴스 앵커 소리 점점 작아지며 사라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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