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조선, 수주는 ‘봄바람’ 현장은 ‘칼바람’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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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업계가 연초부터 불어 닥친 감원 칼바람에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 부산일보 DB 한국 조선업계가 연초부터 불어 닥친 감원 칼바람에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 부산일보 DB

연말 몰아치기 수주로 3년 연속 신규 수주 세계 1위를 수성하며 모처럼 신바람을 내던 한국 조선업계가 연초부터 감원 칼바람에 움츠러들고 있다. 릴레이 수주로 해야 할 일감은 넘쳐나는데, 긴 수주 공백 후유증 탓에 정작 지금 할 일감이 떨어진 탓이다. 상반기까지는 ‘일감 보릿고개’가 계속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 속에 대형사를 중심으로 희망퇴직이 시작됐다. 노사 갈등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전국금속노조 대우조선지회에 따르면 사측은 지난달 31일 전 직원 업무연락을 통해 희망퇴직을 발표하고 지난 8일부터 신청을 받고 있다. 대상은 사무직·생산직 직영 직원 중 정년이 15년 미만 남은 1975년 이전 출생자다.


대우조선 25일까지 희망퇴직

삼성중공업 정규직 대폭 감축

공적자금 수혈 때 감축 약속

하청업체 ‘아랫목’ 아직 살얼음


희망퇴직자에게는 최대 1억 7000만 원의 위로금이 지급된다. 1961~1965년생은 통상임금의 6~33개월, 1966년생 이상은 잔여기간의 50%다. 이와 함께 재취업지원금 1200만 원을 추가로 지원한다. 신청 마감은 오는 25일까지다.

2015년 해양플랜트 부실로 인한 천문학적 영업손실에다 극심한 수주 가뭄, 분식회계 등 경영진 비리가 연거푸 터지면서 최악의 경영위기에 직면했던 대우조선해양은 채권단으로부터 4조 2000억 원 규모의 공적자금을 수혈받는 조건으로 몸집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이에 부문, 팀, 그룹 수를 30%가량 줄이는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이듬해 채권단에 낸 자구계획에서 직영 직원은 1만 3290명 중 5500명(인건비 45%) 감축을 약속했다. 경영진은 곧장 구조조정에 나섰고 지난해까지 무려 4277명이 직장을 떠났다. 하지만 약속 이행을 위해선 아직 1100여 명 이상을 더 추려내야 한다.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LNG 운반선. LNG선은 국내 조선 3사의 주력 선종으로 연말 릴레이 수주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설계, 자재 확보 등 준비 기간 탓에 현장 일감으로 풀리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부산일보 DB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LNG 운반선. LNG선은 국내 조선 3사의 주력 선종으로 연말 릴레이 수주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설계, 자재 확보 등 준비 기간 탓에 현장 일감으로 풀리려면 최소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부산일보 DB

다만, 사측은 이번 희망퇴직이 자구안 이행을 위한 조처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인원에 비해 일감 확보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최근 몇 년간 수주 목표를 달성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수주 부진에 따른 경영 환경 악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우조선해양은 2014년 이후 연간 수주 실적이 매번 목표치를 밑돌고 있다. 지난해 54억 1000만 달러를 수주해 목표의 75%를 채우는 데 그쳤고, 2019년과 2018년도 목표치의 70~80%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노조는 “희망퇴직을 빙자한 정리해고”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해다. 노조는 “희망퇴직은 자본이 만들어낸 가장 잔혹한 정리해고 수단이자 대규모 구조조정의 신호탄”이라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수주 가뭄에 허덕여 온 삼성중공업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6년부터 채권단 자구안에 따라 상시 희망퇴직을 받아 온 삼성중공업은 1만 3177명이던 직영 직원을 1만 35명까지 줄였다. 사측은 올해도 희망퇴직을 받는다.

이들 조선사는 2000년대 조선업 호황기 때 노동력 수요가 큰 해양플랜트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해 대규모 수주와 고용이 선순환을 이뤘었다. 하지만 국제유가 하락이 이어지면서 해양플랜트 발주가 중단됐고, 신규 선박 발주도 과거 호황기만큼은 못 따라가 인력 규모에 맞는 일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세밑 연이은 수주로 분위기는 끌어올렸지만, 설계, 자재 확보 등 준비 기간을 고려할 때 현장에 일감이 풀리려면 최소 6개월 이상 걸린다.

대형 조선사가 주는 일감으로 버텨야 하는 중소 협력사는 속이 타들어 간다. 이미 몇 달째 일감이 없어 일손을 놓고 있는데, 올해도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야 할 판이다. 협력사 관계자는 “원청도 일이 없어 사람을 자르는 마당에 우리한테 돌아올 몫이 있겠나. 밖에선 연이은 수주로 이미 봄날이 온 듯 말하지만, 현실은 한 발짝 내딛기도 힘든 살얼음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거제의 한 조선기자재협동화공단. 대형 조선소에서 받아오는 일감이 바닥나면서 수개월째 개점 휴업 상태다. 부산일보 DB 거제의 한 조선기자재협동화공단. 대형 조선소에서 받아오는 일감이 바닥나면서 수개월째 개점 휴업 상태다. 부산일보 DB

거제 양대 조선소 협력사는 작년 11월 말 기준으로 사내·외를 합쳐 232곳, 노동자는 3만 1150여 명이다. 불과 1년 새 58곳이 문을 닫았고 8100여 명이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대로는 기술·생산경쟁력 저하는 물론, 정작 일감이 들어왔을 때 일할 사람이 없게 된다. 앞서 고강도 구조조정을 강행했던 거제지역 조선업계는 2018년을 기점으로 수주가 늘자 숙련공 부족 역풍을 맞은 바 있다.

이런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거제시는 ‘거제형 조선업 고용유지 모델’을 가동하고 있다. 돌아올 수주 회복기에 대비하고, 수주한 물량이 현장에 풀릴 때까지 숙련인력 유출을 최소화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이를 위해 국비 등 877억 원을 투입해 4개 분야 9개 지원 사업을 병행하며 6000여 명의 숙련인력을 지킨다는 복안이다.

다행히 업황 전망은 어둡지 않다. 영국의 조선해운시황 분석업체 클락슨리서치는 올해 신조선 발주량이 모잠비크, 카타르 등 대형 LNG 프로젝트발 훈풍에 코로나19 지연 물량, 그리고 친환경 선박 교체 수요까지 더해지면서 전년 대비 24%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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