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리는 작가’가 펼쳐 낸 삶의 여정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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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근 초대전 ‘희망으로 가는 길’

전영근 '마을과개울이 보이는 시골길'. 갤러리조이 제공 전영근 '마을과개울이 보이는 시골길'. 갤러리조이 제공

자동차가 짐을 싣고 숲길을 달린다. 참새가 보이는 들판을 지나간다. 거친 언덕길도 올라간다.

전영근의 그림을 보면 우선 ‘여행’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많은 이들이 그를 ‘여행을 그리는 작가’로 생각한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의 그림 위에는 ‘삶의 여정’이 겹친다. 전영근 초대전 ‘희망으로 가는 길’이 해운대구 중동 갤러리조이에서 2월 28일까지 열리고 있다.


자동차 위에 얹은 여러 물건

지혜·해·자유로워짐 상징

동양화처럼 복합 시점 활용

한 화폭에 봄 가을 함께 담아


“원래는 정물 작업을 했다.” 전 작가는 원주대와 성신여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대학 강사로 일했다. 1주일에 3일 강의하고 4일 그림을 그리는데 그 삼 일도 아까웠다. “먹고 살아야 하니 강의는 해야 하고, 작업할 시간은 부족하고… 절박함에 차 안에서 머릿속으로 작업을 했다.” 그림에 자동차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처음에는 정물로서 자동차를 조명했다. 거기에 구름, 길 등 작가가 강의를 다니며 본 풍경, 유년 시절의 기억이 더해졌다. 그림 속 자동차 위에 여러 물건이 올라가 있다. 전 작가는 어린 시절 경험한 천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다. “삶과 연관 지어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솥단지, 주전자 등 다양한 것을 올려보다가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단순화했다.”


전영근 '개망초가 핀 풍경'. 갤러리조이 제공 전영근 '개망초가 핀 풍경'. 갤러리조이 제공

모포, 튜브, 수박, 우산, 가방, 낚싯대 등 먹고 자고 공부하고 즐기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보인다. 지팡이도 되고 방패막이도 되어주는 우산은 삶의 지혜를 상징한다. 언뜻 보따리처럼 보이는 튜브는 해를 상징한다. 자동차 뒤에 둥근 형태가 생기며 전체 그림이 완결된다는 설명이다. 전 작가는 “줄이 풀린 낚싯대는 정리된 것 속의 흐트러짐,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며 웃었다. 붓 터치를 한 번에 강하게 찍어서 끝내는 자신의 그림에 찰랑거리는 귀걸이 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란다.

전 작가는 그림에 대한 해석은 보는 사람의 몫이라 생각한다. “100명 중 98명이 제 그림을 여행으로 보지만, 두 명 정도는 너무 힘들다고 말한다.” 작가는 예전 서울 전시 때 만난 할머니 관람객 이야기를 했다. “지팡이를 짚고 부축까지 받으며 오셔서 ‘당신 그림을 보면 내 인생이 생각난다’고 하시더라. 내밀한 부분까지 읽어주셔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영근 '산을 오르다'. 갤러리조이 제공 전영근 '산을 오르다'. 갤러리조이 제공

‘산을 오르다’라는 작품 앞에서 전 작가는 동양화의 ‘산점 투시 화법’을 언급했다. “서양화를 그리지만 조형적으로 동양화에 가깝다. 자동차는 뒤에서, 길은 위에서, 나무는 옆에서 바라보는 복합 시점을 사용하고 있다.” 은행나무로 만든 조각 작품 ‘여행’에서는 복합 시점이 더 두드러진다. “조소 전공을 하고 싶었는데 그림을 그리게 됐다. 나중에 욕구가 넘쳐흘러서 종종 조각 작업도 같이한다.”

전 작가는 여러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내는 동시에, 여러 시간을 담아내는 작업도 선보인다. 두 개의 그림이 세트를 이룬 ‘마을과 개울이 보이는 시골길’은 한 화면에 개나리 피는 봄과 감 익는 가을이 같이 그려졌다. 그림 위쪽의 버스는 옆 겨울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전 작가는 “다음에는 한 화면에 사계절을 다 넣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멈춰버린 시대, 전 작가는 여행 속 작은 추억의 소중함도 되새겨준다. 길가에 무성한 개망초 아래 청개구리 한 마리가 깜찍하다.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 근처에서 마주할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나가다 눈으로 본 것들을 마음에 담아서 여과시키고 또 변형해서 그림으로 표현한다.”


전영근 '무제'. 갤러리조이 제공 전영근 '무제'. 갤러리조이 제공

‘무제’라는 제목을 가진 두 개의 작품이 보인다. 꼬불꼬불 언덕길을 오르는 자동차를 품은 발사나무 조각과 하늘색 자동차 위에 활짝 핀 꽃들이 올려진 그림. 삶의 길을 달려온 이름 없는 누군가에게 희망의 꽃을 선사하는 것 같은 작품이다. ▶전영근 초대전 ‘희망으로 가는 길’=2월 28일까지 갤러리조이. 051-746-5030.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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