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통제사길’, 무책임 행정에 훼손 위기
조선 시대 경상·전라·충청도 수군 본진을 통솔한 삼도수군통제사 사적비가 무더기로 출토된 경남 통영의 ‘통제사길’ 발굴지가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통영시가 지난해 발굴지와 맞닿은 땅에 건축허가를 내 준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부지에 오는 3월 1일 공사를 시작한다고 알리는 표지판에 서 있다. 독자 제공
조선 시대 경상·전라·충청도 수군 본진을 통솔한 삼도수군통제사 사적비가 무더기로 출토된 경남 통영의 ‘통제사길’ 발굴지(부산일보 2015년 12월 21일 자 12면 보도 등)가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사적비는 통제사 개인의 행적과 연보가 상세히 기록된 유일한 흔적으로 학계에선 추가 발굴 필요성을 제기했었다. 그런데 수년째 뒷짐이던 통영시가 최근 연접지에 건축허가를 내 준 것으로 확인됐다. 이대로는 통제사 연구의 밑거름이 될 사료들이 빛도 못 본 채 사장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2일 통영시와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시는 지난해 4월, 무전동 850-1번지와 851-3번지 946㎡에 대한 개발 행위를 허가했다. 이후 건축주는 12월 설계변경을 거쳐 최근 착공계를 냈다. 지상 4층(1층 상가, 2~4층 다가구 주택) 규모 건물을 짓는 이 공사 착공 예정일은 3월 1일이다.
통제사비 24기 발굴된 지역
전문가 추가 발굴 필요성 제기
시·문화재청 7년째 ‘나 몰라라’
인접해 건물 신축, 소실 비상
문제는 공사 현장이 2014년 10월 통제사비 24기가 발견된 발굴지(무전동 783번지)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당시 발굴된 비석은 길이 1.5m, 너비 60cm, 두께 30cm 크기로, 비문을 통해 통제영 지휘관이던 통제사의 공덕을 기리는 사적비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확인된 비슷한 매장문화재 발굴 사례 중 가장 큰 규모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특히 비석 내용이 통제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된다는 점에서 기대가 컸다. 매장문화재 수습조사를 진행한 문화재청 산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비석을 통해 통제영의 군사제도와 실제 운영, 재정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전문위원들은 비석 세부 연구와 함께 또 다른 비석이 주변에 묻혀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주변 지역에 대한 추가 발굴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사적비의 주인공은 모두 ‘전의 이씨(全義 李氏)’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족보에 기록된 이지원, 이방수 통제사비를 비롯해 비석의 이수(비갓), 좌대 그리고 ‘매치비’(먼저 묻은 비석을 기록한 조형물)에 남은 일부 비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4년 10월 옛 통제사길 추정지에서 발굴된 통제사 사적비 24기. 발굴 후 삼도수군통제영 복원지에 옮겨졌지만, 뙤약볕과 비바람을 막아줄 보호막도 없이 1년 넘게 방치되다 잇따른 훼손 지적에 겨우 지붕을 얹었다. 독자 제공
게다가 발굴지점은 조선 시대 한양과 통영을 오가는 대로인 ‘통영로(통영별로)’였다. 지금은 텃밭으로 사용되는 외진 곳이지만 과거 역대 통제사들이 부임과 퇴임 때 지나던 길이라는 의미에서 '통제사길'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통영시의회는 추가 발굴과 조사·연구를 통해 통제사 연구와 통제사 길 활성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통영시와 문화재청이 서로 업무를 미루면서 7년째 제자리걸음만 했다. 이듬해 통영시는 경남도를 통해 문화재청에 '긴급 발굴 조사 지원'을 요청했다. 발굴지 주변 330㎡에 대한 추가 조사 예산 1억 7890만 원을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긴급하지 않다”며 거부했고, 이후 두 기관 모두 사실상 손을 놨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전문위원은 “비석 발굴지 인근은 조선 시대 10대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형”이라며 “공사가 시작되면 훼손이 불가피하다. 만약 공사 중 추가 유물이 나오면 건축주도 손해를 본다. 지금이라도 긴급발굴조사를 진행해 필요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통영시는 “토지이용계획상 아무것도 없는 필지인 데다, 유증지역도 아니라 법적으로 제한할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다만 “건축주에게 지표 조사는 요구할 수 있다. 허가된 부분에 대해 도와 협의 후 전문가 의견을 받아 (지표조사)진행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