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부산 동광동 100평 '거대 땅굴'이 목격됐다(feat. 코모도호텔)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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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중구 주택가 한가운데 목격된 '거대 땅굴'.

4~5채 집 아래 무려 100평 남짓 공간이 뚫려 있답니다. 방 안에 또 방이 있고…. 격자형 내부는 크고 작은 방들이 연결돼 미로를 연상케 한다고.

'암실' 같은 이곳에 최근까지 사람이 살기도 했다는데….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잔재인 이곳을 직접 찾았습니다.


부산 코모도호텔 뒤 산복도로.

왕복 2차로 옆 인도를 따라 걷던 중 뜬금없이 반지하 입구가 나타났습니다.

10m 거리를 두고 양쪽에 나 있는 '육각형 입구'. 옛 베란다 창살 같은 미닫이 철문을 열자 '거대 땅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내부에 들어서자 양쪽 입구는 한 통로로 이어졌습니다.

통로 안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땅굴 윗집에 사는 천성열(67·동광동) 씨가 익숙한 듯 수십m짜리 이동용 전선과 전등을 들고 앞장섰습니다.

빛을 따라 걷자 오른쪽에 첫 번째 방이 나타났습니다. 5~10평 정도의 방에는 구석에 우물이 보였습니다. 땅굴이 지어진 후 식수용 등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두 번째 방은 족히 2배는 넓어 보였습니다. 방과 연결된 문만 3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방들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땅굴 높이는 2m가량. 위쪽으로 연결된 환풍구도 곳곳에 뚫려 있었습니다.


60~70대 주민은 어릴 적부터 이 땅굴을 봐왔다고 증언했습니다.

내부에 합판을 쳐 놓고, 단칸방처럼 많게는 20가구 가까이 살았다고. 1년 반 전만 해도 노모와 아들이 거주했답니다.

천 씨 기억도 생생합니다.

“여기 사시던 분들이 갈치나 생선 같은 거 입구에서 팔며 생계를 유지했었죠. 마지막까지 계시던 노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관리가 안 돼 잡쓰레기들로 가득했습니다. 쥐가 더러워서 못 들어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 1~2년 전쯤 구청 도움으로 깨끗하게 치웠습니다.”

땅굴 옆 철물점을 운영하는 박동규(66·동광동) 씨도 추억을 곱씹었습니다.

“17가구인가 그 안에 살았습니다. 수도가 없으니, 근처 우물까지 양동이 짊어지고 가서 퍼왔죠. 화장실은 건너편 공중화장실을 썼습니다. 땅굴 안에 불이 안 들어올 때는 친구들과 술래잡기하며 놀기도 했습니다.”

이 땅굴은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때도 존재감을 발휘했습니다.

부산역전 대화재는 중구 피난민 판자촌에서 시작한 불이 부산역까지 번진 사고. 부산역이 전소되는 상황에서, 두꺼운 벽에 둘러싸인 이 땅굴은 멀쩡했답니다.


희귀한 땅굴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건너편 주택에는 집 안과 연결된 대형 땅굴이 있다고. 아쉽게도 이날 거주민 허락이 나지 않아 내부를 눈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취재팀은 부경근대사료연구소을 통해 과거 사진을 확보했습니다. 격자형으로 나누어진 동굴 내부는 반원 형태의 입구들이 뚫려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땅굴을 일제강점기 말 만들어진 '방공호'로 추정했습니다.

단순 민간 대피용이 아닌, 일본 군부대가 피할 수 있는 대형 방공호. 실제 땅굴 바로 앞 부산 코모도호텔 부지에 일본군 요새사령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부산 요새사령부는 1941년 경남 진해에서 부산 영주동으로 옮겨왔습니다.

땅굴 내부를 격자형으로 만든 것은 한쪽이 폭격에 무너질 것을 대비했다고 합니다. 대피를 위해 출입구도 2개를 만들었다고.

김한근 소장은 "방공호는 대피용이 있고 중요한 자료 보관용이 있다"면서 "100평 땅굴은 대규모 인명 대피용, 집 안 땅굴은 탄약, 기밀문서 보관용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땅굴 조성에는 민간인들이 강제 동원됐다고 합니다.

동아대 전성현 사학과 교수는 "주변에 일본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1차적으로는 군부대 관련한 대피·저장 공간으로 보인다"면서 "이런 굴이나 사령부 건물을 지을 때는 평탄화 작업부터 건물 올리는 작업까지 조선인들이 상당수 동원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습니다.


취재팀은 이날 두 땅굴 이외 또 하나의 대형 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를 두고 옛 일본군 요새사령부~부산 앞바다로 이어지는 지하 통로가 아니냐는 말이 나옵니다.

실체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목격담과 증언이 있습니다.

실제 중구에 있는 토요코인호텔 터파기 공사 당시, 수십m 떨어진 건물 두 채가 뜬금없이 내려앉았답니다. 땅 아래 빈 공간이 있었던 것.

무너진 건물들은 옛 일본군 요새사령부에서 부산앞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습니다.

당시 건물 주인도 이를 생생히 기억했습니다.

"쫙 길이 갈라지더라고요. 전문업체가 카메라를 지하로 내려서 봤는데,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길이) 산복도로 위쪽으로, 또 부산역 쪽으로 나 있었고요. 우리 가게 앞이 옛날에는 바다였습니다."


부산 중구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본거지이자 태평양전쟁의 핵심 군사요새였습니다.

용도와 크기도 모른 채 방치되고 있는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가 곳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역사 현장은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 삶과도 연결됐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부산만이 가진 이 역사는 도시개발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증언과 목격담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 땅에 남겨진 근대유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지금부터라도 시작돼야 합니다. 지자체 주도로 산발적으로 방치된 유산을 하나둘씩 발굴하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김한근 소장)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촬영·편집=정수원·이재화 PD blueskyda2@busan.com

촬영·그래픽=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장은미 기자 mi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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