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파도를 유혹하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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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우제봉

뜻하지 않게 봄꽃 구경을 한 셈이었다. 개나리는 이미 활짝 피었고 진달래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노란색, 자주색 들꽃도 하나둘씩 흙을 뚫고 머리를 내밀었다. 따뜻한 남쪽 언덕에는 성급한 벚꽃이 벌써 활짝 웃고 있었다. 막바지에 이르러 활짝 핀 동백꽃은 그들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파도소리 들으며 전망대 가는 길
산책로 바닥엔 붉은 동백이 지천
해금강 풍경 1.2km 내내 동반
전망대엔 우제봉 배경 ‘사진 액자’
봄꽃 따라 떠난 바다 풍경 여행길

■14번 도로 바닷길

거가대교를 지난 뒤 14번 도로 바닷길로 접어들었다. 한가한 해안로에서 굳이 속도를 낼 필요가 없어 느긋하게 달린다. 자동차 창문을 열어 봄바람에게 차 안을 살펴볼 기회를 준다. 맑은 공기에 섞인 갯비린내는 코를 상큼하게 만들어준다.

지세포항을 지난 자동차는 와현해수욕장~구조라해수욕장~망치몽돌해수욕장~흑진주몽돌해수욕장을 차례로 지난다. 해안로를 따라 펜션은 물론 호텔이 줄지어 섰다. 거제에서 펜션이 가장 많은 곳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다.

구불구불 해안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아름답다. 제법 거친 바람에 철썩이는 파도소리는 귀를 시원하게 씻어준다. 시뻘겋게 만개한 동백꽃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유혹하고 있다. 곳곳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여러 사람이 바람을 쐬거나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우제봉 가는 길

해금강 유람선 주차장이 출발 지점이었다. 봄을 찾아 집을 떠나는 행락객이 적지 않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직 이곳에는 봄바람이 덜 불었는지 자동차와 사람은 드물었다.

공중화장실과 횟집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여기서부터 해발 107m 나지막한 언덕 같은 우제봉 전망대까지는 1.2㎞ 거리다. 천천히 걸어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산책로 바닥에는 떨어진 동백꽃이 널브러져 있다. 이 길은 그야말로 동백나무 숲길이다. 잘 찾아보면 꽤 아름답고 탐스럽게 피어 있는 동백이 곳곳에 숨어 있다.

‘서자암’ 안내판이 나타난다. 민가처럼 생긴 작은 성소다. 비경 해금강을 앞마당으로 둔 암자다. 높은 우제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과는 또 다르다. 마당에는 탐스러운 동백꽃이 아직 활짝 피어 있다. 서자암 옥상에 가지런히 놓인 장독은 봄 햇살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앉았다.

서자암에서 우제봉 가는 길은 잘 정비돼 있어 걷기 불편하지 않다. 때로는 흙길이, 때로는 나무데크가 설치돼 있어 편안히 산책할 수 있다. 험하지 않고 완만한 산길이라 힘들지도 않다. 사람이 드문 산책로를 오랜만에 찾는 방문객이 반가운지 파도가 끊임없이 해변을 철썩이며 인사를 건넨다. ‘거제의 보석’이라는 해금강은 외로운 산책객이 심심할까 입구부터 전망대까지 계속 동행해준다.



■우제봉 전망대

나무데크를 지나 돌길을 오르자 잘 가꾸어진 공간이 나온다. 바다와 섬이 아주 가깝게, 다정하게 보이는 우제봉 전망대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이 영생을 보장하는 ‘신비의 영약’을 찾으라고 보낸 서불이 도착한 곳은 거제도였다. 해금강의 풍경에 반한 서불은 우제봉 정상 석벽에 ‘서불과차(徐市過此)’란 글자를 새긴 후 다시 남해로 떠났다. 글씨는 오래 전 태풍 때문에 유실됐다고 한다. 굳이 서불의 이야기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제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거제 앞바다는 제대로 먹칠한 한 폭의 수묵화다.

거칠지도 험하지도 않고, 높지도 낮지도 않는 편안하고 느긋한 언덕의 벤치에 앉는다. 부드럽고 안온한 바다에서 들리는 파도는 은근한 바이올린 연주 같기도 하고 청아하게 흐르는 풀피리 가락 같기도 하다. 주변에 오가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마스크를 벗어 숨을 크게 내쉬어 본다. 따스한 초봄 바닷바람이 미세먼지와 코로나19에 찌들린 코를 시원하게 뚫어준다.

맑은 날이면 외도, 매물도까지 눈에 들어온다. 휴대폰 셔터를 연거푸 누르며 해금강의 풍경을 눈과 가슴에 담는다. 해금강은 거제도 남동쪽 갈곶에서 떨어져 나간 돌섬이다. 거센 겨울 해풍을 이겨낸 우제봉 나무들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렌즈를 향해 방긋 웃는다. 해금강과 우제봉 사이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유람선이 지나간다.

우제봉을 배경으로 깔끔한 ‘인생 샷’ 하나 담아가라는 뜻에서 검은색 기둥으로 ‘사진 액자’가 세워져 있다. 액자 한쪽에 붙은 은색 나비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다. 기둥에는 분필로 새긴 듯한 싯구가 적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꽃(고은 ‘그꽃’ 중에서)’

전망대 맞은편에는 아주 거칠고 험하게 생긴 언덕이 보인다.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게 그야말로 산적 형상이다. 언덕 입구에 ‘군사시설’이라는 팻말이 서 있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전망대와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제봉 전망대에서 내려와 돌아가는 길은 올라올 때의 반대쪽이다. 이곳이야말로 올라올 때보다 더 훌륭한 동백나무의 숲이다. 은은한 피톤치트 향이 흐르고, 바닥에는 동백 낙화가 꽃길을 이루고 있다. 나무에 가려 바다는 덜 보이고 파도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생각을 버리고 무심하게 걷기에는 이쪽 길이 더 어울려 보인다.

반대쪽 길의 끝은 해금강 유람선 매표소 건물 뒤쪽이다. 배를 타러 가는 데크를 따라 걸으면 방파제로 이어지는 해변 산책로로 내려갈 수 있다. 언덕 막바지 양지바른 곳에 다소곳이 핀 보라색 개불알풀이 싱글벙글하며 “봄이 왔다”며 소곤거린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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