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철의 어바웃 시티] ‘분노유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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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도시공학과 교수

오래전 보았던 영화 ‘구타유발자들’이 며칠 전 떠올랐다. 보는 내내 불편했던 영화였는데, 가장 부조리했던 건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였다.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모르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순간 다시 피해자가 되는, 먹이사슬이 돌고 돌아 자신을 옭아맸다. 최근 도시개발과 관련한 공적업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의 부정부패가 국민들의 분노를 유발하고 있다. 소위 ‘분노유발자들’이 등장했다. 개발 업무를 직접 담당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감시하고 막아야 할 그들이 오히려 내부 정보를 악용해 불법 이익을 취한 것이다. 공적윤리의 추락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1939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척박했던 당시 미국의 현실이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적 분노를 그대로 표현해 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인지, 정부는 지난주 ‘부동산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부동산 위기 속 주택 공급대책의 중책을 부여받았던 전직 LH 사장 출신 국토부 장관도 결국 사의를 표명했다. 대통령도 이번 주에 국민께 사과하면서 ‘부동산 적폐 청산’을 약속했다. 한국의 부조리한 부동산 투기 현실은 잘 마무리될 수 있을까?


공공 부동산 개발 업무 부정부패

국민에 열패감과 함께 분노 안겨

공무원·전문가 위주의 현재 방식

개인 양심에만 의존해 한계 뚜렷

시민 감시·투명한 절차 도입 필요

개발행정 혁신 없이는 부패 여전


이런 사태는 예견됐던 일이다. 개발정책을 정부가 독점적으로 계획·결정하고 LH 등의 정부기관을 통해 집행하는 우리나라 개발시스템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됐다. 대부분 광역지방정부도 중앙정부를 따라 지방도시공사와 같은 집행기관을 두고 있다. 이 관계도 속에서 시민들의 투기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시민참여 및 공개 등 투명한 절차는 무시되기 일쑤였다. 도시계획위원회, 건축위원회 등과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각종 위원회 회의 내용도 대개 비밀이다. 오로지 관계 공무원 및 전문가들의 양심 및 윤리에 의존하는 시스템이다. 이러는 사이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지위를 악용’하는 ‘공공부패’가 일어날 수 있는 구조적 토대가 형성되었다. 결과는 현재 우리가 보듯이, 정보에 접근 가능했던 정치인, 공무원, 공사 직원 및 전문가들의 ‘개인 일탈’이 만연하고 있다.

‘분노유발자들’의 도시로 보자면 부산도 빠지지 않는다. 토건 세력이 특히 강하고 각 분야에 걸쳐 시민들의 관심이 부동산에 집중된 지역이어서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모를 정도의 도시가 돼 가고 있다. 한때 시민들의 분노를 유발했던 엘시티(LCT) 특혜 분양 의혹 리스트가 다시 제기되어 지역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전형적으로 도시계획위원회를 통한 규제완화 등 특혜를 받았던 사업이다. 특혜 분양이든 아니든 진정 유력한 인사라면 불법과 편법으로 점철된 이러한 곳에 분양 신청도 피했어야 했다. 여전히 부산시 내 공공부패는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부산시의회는 ‘개발비리 조사특위’를 발족시켰다. 방송에 보도되었던 송도와 송정지역 특혜의혹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방송에서는 공직자라면 낯 뜨겁고 부끄러운 장면이 그대로 방영됐다. 공익의 가면을 쓰면서 여전히 너도나도 한몫 챙기는 아비규환의 사회가 된 것인가? 공익수호자로서의 이상은 너무 큰 바람이었을까? 최근 알려진 부산시청 공무원의 생활형 숙박시설(레지던스) ‘나 홀로’ 탈출 소식은 허탈한 웃음마저 준다.

국가 및 지방 도시개발 행정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정치적 의도를 떠나 경제학자 출신 유승민 전의원의 ‘공공 부패’에 대한 일갈은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재량권을 가지고 책임은 지지 않을 때, 부패의 곰팡이가 자란다”며 비판한다. 국토부와 LH는 무주택 저소득층의 주거복지에 전념해야 한다. 또 도시개발에 관한 권한도 지방정부에 더 적극적으로 이양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의 주장처럼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시장성 및 경쟁력이 부족한 지방에서는 산업화 시기 우리나라 중앙정부가 취했던 공공주도 개발이 여전히 필요하다. 지금 지방에 필요한 건 시장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민주적이고 투명한 개발과정’을 통한 서민들을 위한 공공개입의 활성화이다. 도시개발에 관한 지방정부에의 권한 이양은 지방분권적 측면에서 바람직하지만, 투명한 개발과정에 관한 노력과 시민감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방을 중심으로 한 공공부패의 곰팡이가 더욱 크게 자란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혁신과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직자들의 윤리의식 강화와 스스로의 자정 작용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부동산 투기에 관한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부동산 탐욕의 부조리한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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