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899. ‘두터운 벽’이라니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이진원 교열부장

지난주 이 난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에게 지원을 더 ‘두텁게’ 하자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자, ‘두텁다’를 써도 된다는 사전이 있다는 독자 의견이 있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은 두텁다 뜻풀이를 ‘신의, 믿음, 관계, 인정 따위가 굳고 깊다’라고 했지만, 이 사전은 사물의 두께가 보통의 정도보다 클 때도 ‘두텁다’를 쓸 수 있다고 풀이했다는 것(두터운 입술/두터운 코트). 실제로 이 사전은 집단의 규모가 미더울 만큼 탄탄할 때도 ‘선수층이 두텁다’처럼 쓸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사전이 같을 수는 없을 터.

하지만 이 사전 뜻풀이에도 의구심을 자아내는 구석이 있다. 작은말인 ‘도탑다’를 보면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고만 돼 있을 뿐 ‘사물의 두께’나 ‘집단의 규모’에 이 말을 쓸 수 있는지는 밝히지 않은 것. 큰말은 의미 확장을 인정하면서 작은말은 기본의미로만 쓰라고 한 것이다. 한편, 표준사전에도 오류가 있다.

*두텁다: 신의, 믿음, 관계, 인정 따위가 굳고 깊다.(두터운 은혜./신앙이 두텁다./친분이 두텁다./정이 두텁다./두터운 교분을 유지하다.)

*두껍다: ①두께가 보통의 정도보다 크다.(두꺼운 이불./두꺼운 책./두꺼운 입술./추워서 옷을 두껍게 입었다.) ②층을 이루는 사물의 높이나 집단의 규모가 보통의 정도보다 크다.(고객층이 두껍다./지지층이 두껍다.) ③어둠이나 안개, 그늘 따위가 짙다.(두꺼운 그늘./안개가 두껍게 깔렸다./….)

뜻풀이를 이래 놓고는, ‘신의, 믿음, 관계, 인정 따위’ 사람의 마음에 관한 것이 아닌데도 ‘두텁다’로 쓴 보기글 여럿을 사전에 올려 둔 것.

*어군 탐지기는…물속 어군을 두텁고 새카맣게 기록하고 있다.<천금성, 허무의 바다>(‘변침하다’ 보기글)

*옷을 너무 두텁게 입어서 팔다리가 굼적거리는 것 같다.(‘굼적거리다’ 보기글)

*내가 손을 대고 있는 이 나무나, 나뒹구는 돌이나,…두텁고 불투명하게 느껴진다.<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무채색’ 보기글)

*두텁게 막힌 사우나 욕탕 안은 뜨거운 수증기로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최인호, 지구인>(‘욕탕’ 보기글)

*…인자로운 백부 철신의 돌봄을 두텁게 받으며 자랐다.<한무숙, 만남>(‘인자롭다’ 보기글)

*두텁고 투박한 방탄복을 껴입고 적의 저격에 대비해 계속 긴장해야 했으므로 그는 지쳤다.<이원규, 훈장과 굴레>(‘저격’ 보기글)

글쎄, 이 정도면 단순히 오류라 하기엔…. 차라리 ‘두텁다/두껍다’를 동의어로 처리하는 게 낫겠다.

jinwoni@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