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움직일 수 없는 역사
영화평론가

얼마 전 미국의 대학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규정한 논문을 학술지에 실어서 논란이 일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질렀던 만행을 자발적 성매매라고 주장한 그 교수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는 한 교수만의 사건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여전히 피해국에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역사에서 전범국의 이미지를 지우는데 여념이 없는 ‘일본의 사건’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일본의 반성과 사과이다.
그러던 와중에 놀라운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일본 내에서 이런 자성적이고 양심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사실 일본 내에서 전범과 자신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영화가 있었는지 돌아본다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일본 우익과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를 추적한 다큐 ‘주전장’이 있었지만 연출과 각본을 맡았던 미키 데자키 감독은 일본계 미국인이다. 지금까지 일본 영화계에서 2차 세계대전을 다룰 때는 억울함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는 파격에 가까운 영화가 분명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스파이의 아내’
일본서 드문 자성적 목소리 담아
만주 생체 실험 日 731부대 폭로
남편 유사쿠 아내 사토코 이야기
인물 묘사로 당시 시대상 잘 살려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사토코’는 고베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유사쿠의 아내로 풍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쟁 상황이 악화되고 있지만 그녀에게 정의나 평화보다는 가정의 행복과 남편의 사랑이 더 중요한 평범한 여성이다. 남편 ‘유사쿠’는 젊은 시절 세계를 여행하며 쌓았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이라 칭한다. 그리고 또 한 명 사토코의 소꿉친구이면서 헌병대 대장 ‘타이지’는 전시 상황에서도 신식문명에 도취된 이들 부부를 곱게 보지 않으며 부부를 예의 주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영화는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일본 사회와 세계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아가자 유사쿠는 아내에게 일본의 감시가 더 심해지기 전에 사업차 만주국에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영화는 만주로 떠난 유사쿠에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만주를 다녀온 유사쿠는 일본이 생체 실험을 자행하는 필름과 자료를 찾았다며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겠다고 말하며 아내와 대립한다. 사토코는 주변 사람마저 희생시키는 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남편을 매국노라고 단정한다. 참상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간극이 생기며, 두 사람의 평온한 삶 또한 변화한다.
그리고 생체 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의 역사를 숨기기 위해 타이지를 비롯한 군인들 또한 유사쿠 일행을 사찰하는 등 온갖 악랄한 행위를 일삼는다. 하지만 역사는 숨기려고 해도, 부정한다고 해도, 절대 지워질 수 없다. 결국 사토코도 유사쿠의 의지에 가담해 미국 망명을 도모하며 유사쿠의 동료가 된다.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전쟁에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인물들을 그리지 않는다. 시대에 저항하는 인물, 시대에 순응하며 그 체제를 따르는 인물, 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다양한 인물 군상을 표현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극을 만들었다. 전쟁영화지만 예산 규모가 크지 않기에 전쟁의 참담한 광경이나 스파이 활동 등은 배우들의 대사나 도시의 풍경 등으로 간접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스펙터클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감독의 장기인 인물들의 의심과 집착, 공포감을 조성하는 분위기에서 충분히 전쟁영화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유사쿠가 아내를 주인공으로 찍은 영화의 흑백 필름 이미지는 기이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며, 통제되고 경직된 1940년대 일본의 시대 분위기에서 오는 긴장감과 불안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만 만날 수 있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