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코로나 통제로부터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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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곤 가나병원 병원장

르네상스 운동이 한창 절정이던 16세기 초반 네덜란드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그린 ‘광인의 배’가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 상당히 난해한 그림이다. 꼭대기 해골을 보면 배는 틀림없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승선자들은 음식, 욕정 그리고 탐욕에 걸신들린 듯하다. 이들의 ‘일탈’과 ‘비정상’은 르네상스가 상징하는 가치가 절대로 될 수 없다.

서양에서는 정신장애인과 부랑자, 사회 부적응자, 집착하는 자 등 모두를 광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광인의 배는 비정상으로 낙인 받은 광인들을 마을 밖으로 은밀히 배제시키는 도구였다. 다행히 쫒겨난 광인들 중 일부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곳은 정신장애인들이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만들어가는 체계적 기반이 됐다.

비정상인을 사회로부터 배척하는 것은 동양도 마찬가지다. 일본에는 1950년대까지 ‘자시키로’라는 독방이 있었다. 정신장애인이나 나이든 노인을 가둬두는 방이다. 가족이 그들을 돌보았고 그것도 어려우면 자시키로를 이용했다. 형태는 달라도 서양과 동양 모두 사회안정을 명목으로 비정상인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코로나19 종식을 애타게 기다린다. 대만과 뉴질랜드는 국가 간 이동을 강력히 제한하고, 쿠바는 감염자에게 생활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사회격리를 하여 감염 확산을 방지한다. 이들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가들은 방역관리에 꽤 불안정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방역관리가 이루어지는 동안 일탈과 관련된 자살, 범죄, 중독, 비행과 같은 소식도 확실히 줄었다. 방역이 한편으로 일탈도 방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가 됐다. 이제부터 한층 더 신경써야 할 것은 소위 비일탈자와 정상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스트레스이다.

필자는 사회적 교류의 통제에서 유발되는 정신적 고통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일찍 퇴근하면서 취침과 기상시간이 빨라지게 되어 새벽에 책과 신문을 보게 되었는데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주말이면 세 아들을 데리고 잊고 지냈던 시골집을 찾았는데 전원공기가 건강에 좋은 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골목길 투어, 자전거 타기 등을 주도해 보면서 실외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음으로 아픔에 대해 의미두기를 해보았다. 어릴 적 가족 실수로 생긴 화상을 밉게만 보아왔는데 지금은 나도 조심했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자전거 타다 생긴 골절상 치료가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때도 참았는데 하는 위안의 기준이 됐다. 이렇게 아픔을 관조하다보면 내 면역세포가 바이러스를 잡아먹을 때 나는 이 아픔도 지나가리라 하는 새로운 경험치를 갖고 새로 적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코로나19 통제로부터 자유를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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